[데스크시각-손영옥] 대통령은 패러디가 싫으시나
입력 2014-05-29 02:54
패러디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입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한 위트 넘치는 통렬한 풍자는 즐거움을 넘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한다.
자연, 권력자들이 수난을 겪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 들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단골 대상이 되고 있는 건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패러디한 ‘세월호 스티커’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한복 차림으로 웃는 대통령. 수평선에는 가라앉는 중인 종이배가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가 보인 무능을 희화화한 것일 게다.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발생한 악재를 소재로 했으니 정부로선 불편할 것이다.
선진국은 다양한 견해로 허용
대통령의 패러디 수난사는 지구촌 곳곳의 현상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달 초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사치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재임이 확실시되는 제이컵 주마 대통령. 그를 옛 소련의 레닌처럼 묘사한 그림이 2012년 갤러리에 걸린 적이 있다. 대통령은 소송전을 불사했다.
선진국에선 흔해서인지 무대응이 일반적이다. 최근 영국에선 찰스 왕세자 등을 풍자한 ‘킹 찰스 3세’라는 연극이 상연 중이다. 포스터에는 실제 찰스 왕세자의 얼굴이 사용됐다. 입에는 X자로 테이프까지 붙어 있지만 영국 왕실은 모른 척한다. 지난 미국 대선 때 성인잡지 허슬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세라 페일린 공화당 후보를 외설적으로 표현했지만 국민 모두가 즐겼을 뿐이다.
구미 사회에서 패러디에 대한 공인들의 관용적인 태도는 지침마냥 공통적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분수령은 1988년 미국 시카고의 워싱턴시장 패러디 사건이다. 백인 미대생이 그린 미술작품이 문제가 됐다. 심장마비로 1년 전 사망한 흑인 시장 헤럴드 워싱턴을 풍자했다. 흑진주처럼 까만 피부의 뚱뚱한 시장은 브래지어와 거들 차림의 반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됐다. 그는 흑인 인권 개선에 앞장서 지역 흑인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분노한 흑인들은 미술관으로 몰려가 작품을 압수했다. 6년여를 끈 소송전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작가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작가가 사실 왜곡이 아닌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행위는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게 구미 사회를 관통하는 원칙이 된 듯하다. 때로는 능청스럽기까지 한 공인의 반응에 작가가 무안할 정도다.
지난 3월 방한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2012년 창피한 경험을 했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걸작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공모전 당선작에 그가 등장했다. 요염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정면을 응시하는 원작의 고급 매춘부를 대체한 건 전라(全裸)의 총리였다. 남성 고객이 준 꽃다발을 건네는 흑인 시녀를 대신해 여성 관료가 캐나다에서 스타벅스보다 사랑받는 커피 체인 팀호튼의 커피를 내미는 장면도 원작과 달랐다. 작가는 “하퍼 정부의 (친미적인) 정책 노선 때문에 느끼는 좌절을 풍자했다”고 말했다. 총리 측은 속으론 아팠을지언정 겉으론 대범했다. “작가에게 실망했다. 총리가 커피를 안 마신다는 사실을 몰랐나.”
풍자 통한 경고도 경청해야
선진국의 자격은 국민소득만이 아닐 것이다. 다양한 견해를 허용하는 열린 태도, 거기에 선진국의 힘이 있다. 패러디는 정공법이 아닌 우회적인 의견 표시다. 당하는 정부나 공인에게는 뼈아픈 조언이겠지만 무시하면 화를 부를 수 있는 경고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는 소통의 리더십을 부각시킨다. 패러디의 경고를 경청할 줄 아는 자세도 이에 속한다. ‘세월호 스티커’ 부착자를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하기보다 짐짓 능청을 떠는 대응은 요원할까.
손영옥 문화부장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