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헌책방
입력 2014-05-28 02:21
최근 출간된 나의 시집 ‘바리연가집’에는 ‘아벨서점’이라는 시가 있다.
“…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서면/ 헌책들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아벨서점’은 따뜻한 오미자차가 아주 인상적인 헌책방이다. 그곳 다락방에선 매달 문학모임이 열리곤 하는데, 언젠가 나는 그곳에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감동이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아벨서점’이라는 시를 쓰게 했다.
거의 5분 만에 썼으므로 과연 시가 제대로 되었는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으니 그 시의 이미지는 나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헌책방이 아벨서점으로 인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니 단숨에 썼을 수밖에.
어린 시절 살던 나의 동네에는 헌책방이 있었고 나는 거의 매일 그곳을 들러 헌책을 빌리곤 했었다. 그 시절 그 책들에 들어있던 ‘광활한 들판’ 같은 것에 나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문학은 아마도 그때 읽은 책들의 ‘카피’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다.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던 헌책들. 그때, 하도 열심히 책을 빌려가고 하니까 아마도 기특하게 보였던지, 그곳 주인은 나에게 어느 날 책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건 새 책이야” 그러면서. 책제목을 보니 ‘릴케 시집’이었다. 그때로선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평론가 김현은 ‘새것 콤플렉스’라는 화두를 던졌었다. 우리의 근대문학사는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추종으로 흘러왔다고 하면서.
오늘 나도 다시 그 화두를 던지고 싶다. 우리는 왜 언제나 새것으로만 살려고 하는가. 헌것에 깃든 정신의 곰삭은 때를 왜 못 견디는가 하고.
우리네 역사라는 것이 헌것임을 잘 알면서, 전통이라는 것이 헌것임을 잘 알면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실은 ‘수만인’이 이미 살아온 헌것임을 잘 알면서, 오늘 우리는 왜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구식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 구식들을 사랑스러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새로운 것에의 미숙함에서 빚어지는 온갖 이 사회의 사고들, 천박함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