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우 목사의 시편]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넘어

입력 2014-05-27 02:29


촌장은 바흠에게 1000루블을 지불하면 하루 종일 걸은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하루 만에 돌아오지 못하면 거래는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바흠은 뜬눈으로 밤을 새며 어떻게 해서든지 땅을 넓게 차지할 궁리를 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많은 땅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너무 멀리까지 갔다. 바흠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원했던 땅은 가지지 못했고 자신의 주검을 묻을 만큼의 땅만 소유했다. 톨스토이는 단편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우리에게 오늘도 묻고 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교회 선택의 자유도 가져보지 못해 호기심 가득한 큰아이에게 6개월간의 자유를 주었다. 청년 사역이 잘되는 교회를 탐방하고 필자에게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하루는 서울의 대형교회를 다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아빠! 교회가 그렇게까지 화려하고 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네 생각에 적당함의 기준은 무엇이니?” 딸은 아직까지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딸의 질문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물음으로 들렸다.

엘리사의 사역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수넴 여인이 있었다. 고마움이 컸기에 엘리사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혹시 그 여인의 가정이 왕이나 사령관에게 구할 것이 있는지도 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물으신다. 얼마만큼의 성도가 필요한가. 얼마만큼의 예배당이 필요한가. 지금 한국교회가 절제와 적절한 통제를 못한다면 더 큰 위기가 찾아 올 수 있다. 가톨릭의 잘못된 통제에 대한 개혁으로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절제와 통제가 없는 자유는 또 한 번의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몇몇 영적인 지도자들이 더 이상 예배당 건물을 확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혹자는 필요한 공간까지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통제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위험한 발상으로 보인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배와 영혼 구원이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은 영혼 구원의 결과다. 교회는 누구도, 그 무엇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 유기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위험한 선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역교회는 지역과 함께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세상이 교회에 그리 과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교회가 교회되기를 기대하기에 쓴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까지도 절제할 때 세상은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고 신뢰를 얻는다면 필요한 것을 소유하려 할 때 박수는 보내지 않아도 침묵으로 동의해 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아닌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적절한 통제와 자기 절제의 덕을 갖추는 것이다.

<일산 로고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