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5) “놀고먹는 국회의원 없는 미국 의회를 배워라”
입력 2014-05-27 03:34
“삐이 삐이, 15분 안에 ○○법안의 표결이 끝납니다.”
허리에 찬 삐삐가 울리면 부리나케 빌딩 지하로 내려가 경전철을 타고 의사당으로 달려간다. 의원회관과 의사당을 오가는 경전철 역에는 표결 15분 전에는 의원들이 먼저 승차하도록 양보해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왜 이렇게 할까. 표결은 반드시 의원 본인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삐삐와 함께 투표카드를 꼭 갖고 다닌다. 의회 상황은 TV 중계를 통해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표결은 현장의 전자투표기에 투표카드를 넣고 ‘예스(Yes)’나 ‘노(No)’ 또는 ‘기권’을 표시해야 한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국회에서 벌어진 대리투표 소동은 말 그대로 코미디 감이다. 슬쩍 눌렀느니, 안 눌렀느니 각 당의 의원들끼리 맞서서 싸우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의원들의 한 표는 국회에 그를 보낸 지역 주민 수십만명을 대표한다. 그러니 한 표가 아니라 수십만 표다. 한 표는 그렇게 엄중한 것이다.
‘놀고먹는 국회의원’이란 우스갯 소리가 미국에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미국 국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법안 외에도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하루도 쉴 수 없을 정도다. 일단 법안이 상정되면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법안 토론을 벌인다. 어느 법안이든 정해진 시간을 넘길 수 없고 토론 시간에는 법안과 상관없는 발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토론이 알차고 격렬하다. 각 당의 토론을 보고 의원의 생각이 바뀌면 바뀐 대로 투표하면 된다. 당에서 찬성한다고 해서 의원 모두가 찬성할 이유는 없다. 당론이라며 의원을 압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은 이념이 같아 모인 집단이지 권력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에 공천권도 없다.
본회의는 끝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 밤 10시까지도 끝나지 않아 의사당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할 때도 부지기수다. 삐삐만 울리면 부리나케 달려가야 하니 도무지 개인생활을 할 수 없다. 한국에 와 보면 의원 보좌관들이 별별 수고를 다한다. 그러나 미국은 다르다. 그들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니 일이 끝나면 칼같이 퇴근을 하고 비서실장만 남는다. 나는 본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밀린 서류를 읽거나 잡무를 처리하며 사무실을 지켜야 한다.
10시가 넘어 비서실장마저 돌아가 버린 의원회관은 썰렁하기 짝이 없다. 적막한 빌딩에 홀로 남아 밤늦게 일을 하려면 배가 너무 고팠다. 별 수 없이 빌딩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다 전자렌지에 끓여 먹기도 했다.
3선의 의원생활 동안 일주일을 워싱턴의 국회와 캘리포니아의 지역구로 나누어 살았다. 거리가 멀다 보니, 잠을 설치고 눈이 빨개진다고 해서 ‘레드아이(red eye)’라 부르는 밤 비행기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매주 목요일 밤이면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지역구로 갔다가 월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되돌아왔다.
미국 국회엔 의원들의 명패가 없다. 지정된 자리가 없으니 아무 자리나 앉으면 된다. 본회의장을 길게 가로지르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공화당, 왼쪽은 민주당의 자리다. 정당을 갈라놓는 통로는 마치 좌우를 가르는 강물 같다. 그 사이로 생각이나 이념이 판이하게 갈린다.
하지만 경제정책에 관한 한 사사건건 의견이 갈리는 보수와 진보도 하나로 뭉칠 때가 있다. 다름 아닌 국가안보와 관련된 경우다. 진보 세력은 평화는 ‘대화’를 통해서만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 세력은 평화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니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보든 보수든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이 앞장서 나가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의 안보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친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