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조국만 지키냐? 난 내 피부도 지킨다… 화장품 바르는 그루밍족 병사들
입력 2014-05-26 02:31
“삼촌은 군대 가서 총 쏘는 법만 배워 오셨나봅니다. 저는 그루밍의 기초를 익혀 왔습니다. 흐흐.”
지난 주말 가족모임에서 손윤수(27)씨는 40대 삼촌한테 “사내 녀석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냐”는 퉁바리를 듣자 이렇게 말했다. 2010년 3월 제대 후 취업을 준비 중인 손씨는 스킨로션은 기본이고,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고, 때때로 BB크림으로 멋을 낸다. 그날도 BB크림을 발라 삼촌 눈에 띄었던 것.
운전병으로 군 생활을 한 손씨는 분대장으로부터 ‘차량정비작업 때는 꼭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전달사항을 받았다. 자외선 차단제가 없었던 손씨는 선임이 빌려 주는 것을 대충 바르고 작업을 했다. 며칠 뒤 얼굴이 얼룩덜룩해지면서 여기저기 허물이 벗겨졌다.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바르기 시작한 그는 병영에 있는 남성잡지를 통해 피부 관리 기초를 익혔다.
“다른 거 볼 게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남성잡지 정말 열심히 읽었어요. 마스크 팩도 미백, 주름, 수분 보충 등 여러 가지고, 미스트, 코팩 이런 것들이 있는 것도 그때 다 알았어요.”
선·후임 병사들 관물대에 자리 잡은 다양한 브랜드의 남성 화장품을 눈동냥하고 슬쩍 빌려 바르면서 그루밍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입대 전부터 피부 관리에 열심인 한 선임이 그의 좋은 스승이었다. 요즘 주 1, 2회 팩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손씨는 “내무반에서 팩까지 하는 것은 어려워 ‘전역한 뒤 꼭 해봐야지’ 결심했고, 그 때문에 귀찮아도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2011년에는 군인들만을 위한 화장품도 나왔다. 바로 위장크림. 이전에는 군대에서 나눠주는 위장크림을 발랐으나 잘 지워지지 않고 한 번 바르고 나면 피부가 거칠어져 원성이 높았다. 이 제품을 처음 선보인 이니스프리의 관계자는 “남동생과 후배들이 위장크림 때문에 피부가 많이 상했다고 해 개발하게 됐다”고 했다. 요즘에는 위장크림 전용 클렌징 티슈도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군인들의 피부 관리에 대한 관심과 화장품 사용량이 많아지자 남성화장품 브랜드들은 군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마케팅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았다. 2011년 비오템 옴므가 ‘비오템 옴므 밀리터리 클럽’을 개설했으며, 2013년 4월 랩 시리즈가 ‘엘에스 아미(LS Army)’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실제로 남성들은 화장품을 군 입대 전보다 후에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서경대 미용예술학과 김지영 교수는 “2007년 서울 여의도, 경기도 연천과 파주, 충북 청주에서 근무하는 군인 314명을 무작위 표본 추출해 조사한 결과 화장품 사용 가지 수가 입대 전에는 678건이었으나 입대 후에는 976건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특히 자외선 차단제 사용자는 49명에서 177명으로 4배 정도 늘었다고 밝혔다. 에센스(70명), 팩(47명), 크림(28명)에 컬러로션(9)까지 쓰는 군인들이 있었다. 김 교수는 “군인들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피부 손상을 받기 쉬운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화장품의 필요성을 입대 전보다 더욱 간절히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방한한 페트릭 쿨렌버그 비오템 옴므 글로벌 사장은 “한국 남성은 외모 관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두 번의 계기가 있다. 바로 군 입대와 결혼이다”라고 말했다. 쿨렌버그 사장은 군대 입대를 그루밍족이 되는 계기로 본 셈이다.
이쯤에서 중장년 군필자(軍筆者)들은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까? “야, 우리 때도 햇볕은 뜨거웠고, 세찬 바람은 불었지만 스킨이나 자외선 차단제 같은 건 구경도 못했다”라고.
군대가 그루밍 세계 입문의 장이 된 것은 남성들의 외모 관리를 부추기는 사회 풍조와 부드러워진 군대 문화가 한몫 했을 것이다.
지난해 8월 영국 시장조사 기업 ‘유로모니터’가 발표한 국가별 남성 피부 관리 실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가별 피부 관리 매출액과 1인당 구매액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국내 남성 화장품 매출액이 전 세계시장의 21%인 6300억원에 달할 만큼 우리나라 남성들은 피부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올 초 육군은 신병들의 군대 적응을 돕기 위해 속옷 양말 등 사제(私製) 사용 검토에 나설 만큼 허용적인 분위기다. 이미 스킨, 로션, 헤어·보디 샴푸나 위장크림은 사제 사용을 눈감아 주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는 군인화장품이 전체 남성화장품 매출의 5%선이지만 앞으로 10∼15%까지 증가할 것”이라면서 그 성장속도는 일반 남성화장품 시장 성장속도보다 빠를 것으로 내다봤다. ‘군인이 나라만 지키는 건 아니다. 내 피부는 내가 지킨다.’ 한 위장크림의 광고문구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