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4) 老母의 충고 “사람은 잘 나갈수록 몸을 낮춰야 해”
입력 2014-05-26 02:19
미국 국회의원들은 손수 운전을 한다. 어떤 차를 타고 싶다고 신청하면 정부에서 자동차 구입비용을 대준다. 나는 의원들이 제일 많이 타는 검은색 포드 자동차를 신청했다. 의원들 중엔 트럭을 몰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워싱턴DC에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 외에 국회의사당과 의원 건물을 잇는 경전철이 있다. 대개 국회의원들이나 보좌관, 행정부 공무원, 기자들이 이용한다. 경전철 옆에는 비상 대피로가 있어서 전쟁이나 테러 발생 시 재빨리 대피할 수 있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원자탄이 떨어져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
하원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워싱턴 인근의 윌리엄스버그에서 공화당 워크숍을 가졌다. 윌리엄스버그는 건국 초기 모습을 재현한 민속촌이다. 집이나 상가, 레스토랑 등이 모두 18세기 모습 그대로다. 그곳에서 공화당 의원과 가족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교육받았다.
특히 부인들은 값비싼 사치품을 갖지 말 것, 비싼 외제차를 타지 말 것,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말 것 등 검소하게 생활하며 언행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받았다. 나는 초선이었지만 최초의 아시아계 의원이어서 금방 유명해졌다.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초의 한국인, 최초의 아시아계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이란 수식어에 걸맞은 의원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공화당에는 지금도 ‘1분 연설’이란 게 있다. 여러 명의 의원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주제에 상관없이 국회 본회의가 끝난 다음 1분 동안 발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1분 연설을 자청했다. 사업을 하면서 이래저래 느꼈던 점들을 쏟아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런 내 모습이 케이블 TV나 24시간 뉴스채널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면서 초선의원답지 않게 유명세를 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민주당뿐만 아니라 백악관에서도 예의주시하는 인물이 되어 갔다.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지기 쉽다.” LA에 사시는 어머니께서 전화로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본래 꽃 피면 꽃샘바람 불고 열매 맺으면 첫서리 내리는 법이다. 사람은 잘 나갈수록 몸을 낮춰야 해.”
늙으신 어머니의 노파심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당선 직후 16명의 보좌관을 고용했다. 주어진 예산안에서는 22명까지 고용할 수 있었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숫자보다는 봉급을 많이 주고 실력 있는 보좌관을 원했다. 의회 활동과 지역구 관리를 위해 워싱턴 의회 사무실에 8명, LA에 7명과 오렌지카운티에 1명을 배치했다. 이 중 한국인 보좌관은 이민 2세 한 명이었다. 이 보좌관은 현재 변호사가 돼 연방정부 이민국의 요직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한인사회를 비롯한 아시아계의 권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골프를 치고 비빔밥을 먹던 친구가 연방의원이 되더니 거만해졌다는 것이었다.
한인사회에서 나를 위해 성금을 보내고 마음을 모아준 것은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치열한 선거운동을 끝까지 치러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 국회의원이지 한인회장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41선거구 지역구민들이 있었고, 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이지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의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미국 국회에 간 최초의 한국인’이었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한인 사회, 나아가 아시아계 커뮤니티는 하원의원 김창준의 또 하나의 지역구인 것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