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가룟 유다 품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용서하고 또 용서…

입력 2014-05-26 02:08


물건이냐, 생명이냐

나를 비롯한 대부분 선교사들의 고민은 아마 ‘도둑’일 것이다. 선교지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양상군자(梁上君子)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른다.

선교지에서 도둑을 피해 살 순 없을까. 가능하다. 사역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일을 안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러나 선교지에서 일을 하면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믿고 일을 맡겼던 사람들에게 속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또 용서하고 이들에게 일을 맡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

나도 선교지에서 황당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중 첫 사건은 1991년 사역지의 한 가정집에서 일어났다. 당시는 물가가 낮아 한 달에 아파트세로 미화 100달러를 내면 참 괜찮은 집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지인이 소개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자동차를 얻어 타며 신세를 졌다. 시간을 내 수고해 주는 주인장이 참 고맙고 미안했다. 보상이라도 해야겠다는 뜻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드렸다. 그것으로 어느 정도 계산이 해결됐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역지로 운전하던 도중 집 주인은 방값 문제를 꺼냈다.

“호텔에서 한국 사람이 하루 머물면 50달러는 줘야 합니다. 저는 식사도 매끼 다 주지만 하루에 50달러만 계산하겠습니다. 운전도 해주고 휘발유도 내가 넣는 데다 심부름도 해드리니 자동차 이용비는 하루에 30달러 받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러니까 내가 그 집에 하루 머무는 비용이 80달러란 것이다. 일주일을 지냈으니 계산하면 560달러. 내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신세는 여기까지 지고 걸어가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도착해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나는 560달러를 바로 계산했다. 그리고 갈 곳도 없이 무작정 그 집을 떠났다.

현지인에게 속은 일이 이뿐이랴. 교회 건축을 하거나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하면 셀 수 없이 사기당하기 일쑤다. 한번은 건축 중에 야간 경비를 세웠다. 그가 밤이 길다며 TV를 사 달라고 해 경비실에 사두었더니 다음 날 없어졌다. 화장실에 갔다 오니 없어졌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TV는 경비원 집 안방에 놓여 있었다. 또 다른 경비를 세웠더니 자꾸 건축 자재가 조금씩 없어졌다. 갑자기 페인트 10통이 한꺼번에 없어져 경비를 추궁하자 자고 일어났더니 없어졌다고 하는 게 아닌가. 경찰을 불러 도난신고를 했다. 3시간 후 경찰이 나를 어느 차고로 데리고 갔다. 차고엔 그동안 도둑맞은 자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단순히 재산상 손해를 봤다고 가슴앓이를 하는 건 아니다.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보내 준 헌금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 크다. 여기에 후원교회와 교단의 의심이 더해지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예전에 이웃도시 A선교사가 사역지에서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A선교사 교단의 선교책임자가 나를 찾아왔다.

“A선교사님이 개인적으로 이 돈을 착복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돈을 빌려줬다가 회수 못했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회수하지 못한 돈이지요. 그 큰 돈을 선교사가 어떻게 착복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이사회에 보고할까요?”

“있는 그대로 보고하셔야죠.”

이사회를 앞둔 교단의 선교책임자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처럼 선교지엔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암초처럼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다.

현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할 때마다 자신을 팔 가룟 유다를 품은 예수님을 생각한다. 아마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아픔을 견디며 살 수 있는 건지 모른다. 갑자기 조개에 모래가 들어와 부드러운 살에 상처를 주는 것과도 같으리라. 그러나 아픔을 머금고 있었던 모래는 먼 훗날 진주가 된다. 선교지에서의 아픔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소망도 이와 같다.

선교지에서 무언가를 잃고 화를 내다 결국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늘 이렇다. “물건이냐? 생명이냐?”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런 사투는 지금도 계속된다.

러시아 종교법

러시아는 ‘정교회의 나라’라 할 만큼 영향이 크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민정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런 러시아에 개방 이후 외국선교사들이 경쟁하듯 너도나도 밀려들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단과 정부는 종교법을 만들었다. 러시아에서 15년 이상 활동하지 않은 선교단체나 교회는 국가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91년부터 선교사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법이 공포된 시점은 98년이었다. 모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각 지역 선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했다. 선교본부와 상황을 공유하던 중 하나님이 피할 길을 알려주셨다.

‘러시아 현지 교단이란 우산 아래 선교사가 소속되면 살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현지의 침례교단과 오순절교단이 우리를 받아줄지가 걱정이었다. 당시 내가 연해주 선교사회 회장이라 현지교단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그간 현지의 교회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

연해주 현지 침례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려움을 당한 외국 선교사에게 도움을 주자.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받아 교회도 살리고 사역자들도 살리자.” 연해주 침례교회의 상부기관인 극동지방회도 같은 답변을 보냈다. 문제는 중앙총회였다. 침례교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총회에서 이틀 연속으로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지역 교회에 지지를 호소하며 모스크바까지 올라온 나를 불렀다. 외국 선교사를 대표해 소견을 말해 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우리 사역 앞날의 향방을 쥐고 있습니다. 받아 주면 우리 외국선교사들은 계속 사역할 수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들이 다음 날 구두로 전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평생 침례교 목사로 남는 조건으로 총회는 외국 선교사를 받는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타 교단의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침례교 목사가 되라는 것이다.

러시아 침례교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겠지만 우리로서는 아쉬웠다. 훗날 러시아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등록이 가능하면 자기 교단을 설립해도 된다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새 법에 맞게 목회자로 재등록할 기간이 임박해서다. 이 조건대로 하자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러시아 침례교단에서 방언문제로 독립한 오순절 총회가 생각났다. 난 급히 러시아 침례교총회의 결과를 문서로 요청해 총회장 서명을 받은 뒤 같은 날 열린 오순절 총회 현장을 찾았다.

러시아 오순절 총회는 다행히 교회 등록을 할 자격이 되면 교리대로 다시 총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조건을 받아줬다. 그야말로 대역전이었다. 오순절 교단에서도 총회 결의 내용을 문서로 받았다.

다음 날 각 지방의 선교사를 모았다. 두 총회 중 어디로 갈 것인지 각자 선택을 하게 했다. 그러자 누가 모든 외국선교사를 대표해 러시아 현지 총회와 교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내가 겨우 받아낸 서류로 자리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러시아 수도권의 한 선교사가 대표로 선출됐다.

다음 날 쓸쓸히 모스크바 공항으로 가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주님이 손짓을 하는 것 같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선교사의 삶은 이름도, 빛도 없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리라.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