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앞둔 청량리 쪽방촌 르포]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 “불나면 어쩌나…” 조마조마
입력 2014-05-24 02:33
낡을 대로 낡아 군데군데 벌레가 좀먹은 나무문을 밀자 ‘삐걱’ 소리가 났다. 문고리에 달린 녹슨 자물쇠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직도 자물쇠로 문을 잠그는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집창촌과 쪽방촌 일대는 그야말로 모든 재난의 사각지대다.
목조 건물을 포함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불이 나면 빠르게 옮겨 붙기 쉽다. 길이 좁아 소방차 진입도 불가능하다. 몇 년 전 대형 백화점과 신축 지하철역사가 들어서며 나름 화려해졌지만 뒷골목에는 아직도 이런 집 수십 채가 남아 있다.
23일 오전 찾은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인근의 4층 건물. 1층에서 철물점과 중국집 등 가게들이 영업 중인 가운데 그 뒤편으로 무너진 벽이 보였다. 이 건물에 비치된 소방장비는 3층 구석에 놓인 소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집창촌 골목이 시작된다. 조립식 패널로 벽을 만들고 지붕 대신 비닐천막을 덮어놓은 곳들이다. 비상구는커녕 창문도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살짝 들여다본 2평 남짓한 방 안은 천으로 된 커튼과 나무 가구 등 가연성 물질이 가득했다. 소화기함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있으나마나’인 셈이다.
인근 쪽방촌에 자장면이 배달됐다. 골목길이 좁아서 배달원은 30여m 떨어진 골목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뛰어 왔다. 한 주민은 “소방서에서 분기별로 점검해주고 소화기도 쓸 줄 안다”며 “걱정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불이 나면 침착하게 소화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과 건물 구조를 고려하면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전농소방서 관계자는 “매일 순찰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며 “15m 길이의 수관을 5개 연결해 소방차에 적재해 놓고 있다”고 말했다. 불이 나면 75m짜리 소방호스를 소방관들이 직접 들고 뛰어야 한다는 얘기다.
12년 전인 2002년 1월 전북 군산 쪽방촌에서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다. 소방차가 좁은 골목에 들어가려 애쓰는 사이, 업주들에 의해 창살에 갇혀 있던 성매매 여성 14명이 숨졌다. 2005년 3월 서울 성북구 쪽방촌에서 난 불은 성매매 여성 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날 불은 20여분 만에 꺼졌으나 건물 내 좁은 통로로 순식간에 연기가 들어차 손쓸 새도 없이 사망한 것이다. 쪽방촌 화재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지만 청량리 거주민 수백명의 안전은 75m짜리 소방호스에 달린 채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글·사진=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