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새겨진 문화와 민족 코드 (5) 이탈리아] ‘守城=생존’ 도시국가 DNA가 ‘카테나치오’ 낳았다
입력 2014-05-24 02:25
정열과 야만. 이탈리아 축구의 특징이다. 이탈리아의 A매치 경기에선 피가 흐르고 폭력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다. 노골적인 틀어막기인 ‘카테나치오(빗장수비)’를 앞세워 이탈리아는 4회(1934·1938·1982·2006)나 월드컵 정상에 올랐다. 유럽 국가들 중 최다 기록이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아주리(Azzurri) 군단’으로 통한다. 아주리는 이탈리아어로 푸른색을 뜻한다. 과거 이탈리아가 강했을 당시 사보이왕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 사보이 왕가를 대표하는 색이 바로 푸른색이었다.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이 A매치를 치를 때마다 푸른색 옷을 입고 경기를 해서 아주리 군단으로 불리고 있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영원한 주장’ 파울로 말디니(46)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축구는 0대 0 무승부 또는 상대의 실책으로 인한 1대 0 승리다.”
경기 자체가 아니라 승부의 결과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특성을 대변한 말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재미없는 수비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이왕이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얄밉게 이기는 게 더 기분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기면 상대 팀 팬들은 화가 날 것이고, 기쁨은 배가된다. 이탈리아에서 공격적이고 화려한 축구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성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이탈리아는 과거엔 밀라노공국, 제노바공화국, 나폴리왕국 등 여러 도시국가로 이뤄져 있었다. 국력이 약한 도시국가들은 늘 함락의 위협에 시달렸다. 함락을 의미하는 패배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축구에서도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인식됐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기질도 카테나치오와 맞아떨어졌다. 카테나치오 전술에선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반칙을 활용한다. 지능적으로 반칙을 저지르고 반칙을 당하는 술수는 이탈리아 선수들의 장기다. 카테나치오는 상대 선수들의 심리를 크게 흔들어 놓는다. 상대는 공격이 좌절될수록 더욱 공격적으로 나온다. 그러면 수비에 빈틈이 생긴다. 그때 이탈리아 선수들은 역습 상황에서 잽싸게 득점한다. 이들은 경기 중에 상대 선수들에게 욕설과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2006 독일월드컵 결승전에서 전 세계를 경악시킨 장면이 나왔다. 프랑스의 중원 사령관 지네딘 지단이 경기 중 이탈리아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박아 버린 것. 퇴장당한 지단은 나중에 마테라치가 자신의 누이와 어머니에 대한 욕설을 했다고 밝혔다. 영악한 마테라치는 지단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순진한 지단은 비열한 술수에 말려들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의 더티 플레이가 속출했다.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김태영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팔꿈치 가격으로 코뼈가 부러졌다. 김태영은 당시 상황에 대해 “피가 많이 나 솜뭉치로 막았는데 목으로 자꾸 피가 넘어갔다”며 “팀 닥터는 단순 타박상이라고 말했는데 경기 후 알고 보니 코뼈가 골절됐더라”고 회상했다.
이 경기에서 프란체스코 토티는 연장전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유도하려다 퇴장을 당했다. 제 꾀에 넘어간 토티 때문에 이탈리아는 1대 2 역전패를 당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던 이기기만 하면 된다’며 비겁한 플레이도 서슴지 않는 이탈리아 축구. 페어플레이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실망스럽다. 하지만 야수 같은 사나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 물어뜯는 모습엔 묘한 매력이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