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페미니즘의 역설
입력 2014-05-23 02:10
수많은 미국인이 배출하길 갈망하는 여성 대통령까지 탄생시킨 우리나라는 적어도 여성인권 분야에서 후진국은 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여성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성은 아니지 않은가. 제1야당 원내대표는 물론 제2 야당의 대표도 여성이다. 여성 총리는 오래 전에 나왔다.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게 정부 부처로 장관이 수장인 여성가족부도 있다.
이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남성들을 압도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들어진 천재가 아닌 타고난 천재만 통과한다는 사법시험 합격자는 여성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 지 오래다. 더욱이 사법연수원 수료자 상위 순번은 모두 여성 차지다.
판사는 물론 검사, 변호사 등 법조계는 이미 여성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여성 법무부 장관도 배출했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 대법원장과 여성 검찰총장만 배출하면 바야흐로 법조계의 여인천하 시대가 완성된다. 지금의 추세라면 앞으로 10년 안에 법조 3륜의 수장 모두 여성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법조계는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다.
남성들이 목매다시피 하는 학연과 지연에 유난히 초연한 것이 여성들의 최대 장점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 학부모로 만나 수십년을 사귀고, 복도식 아파트에 이웃해 살며 남편들 출근시킨 뒤 조석으로 커피를 나눠 마신 지 수년이 지나도 서로의 고향과 출신 학교를 모른다. 아예 관심조차 없다고 한다. 가부장제 폐지와 여성중심주의를 역설한 한국의 페미니즘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검찰과 법원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로부터 전해들은 비화 한 토막. 이들은 하나같이 법조계야말로 여성들이 활약하기 가장 좋은 분야라고 입을 모았다. 사적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여성들의 특성상 수사와 재판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여성 법조인이 많아야 된다는 논리였다. 공무원들에게 청렴결백을 강요하는 법을 마련한 주인공이 바로 대법관 출신 여성 법조인 아닌가.
18세기 말 ‘여권 옹호론’이란 글을 당시 프랑스 총리에게 보냈던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크래프트가 살아 한국을 목격했다면 감동의 눈물을 한바가지 이상은 쏟았을 것이다. 존 로크조차 여성을 시민으로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를 산 울스턴크래프트는 불행했다. 다만 세월호 탓에 모든 이슈가 묻힌 이번 지방선거에 단 한 명의 여성도 도지사 후보로 나서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