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새겨진 문화와 민족 코드 (4) 독일] 2차대전 아픔 ‘군대축구’ 가 세계 최강 ‘전차군단’ 으로

입력 2014-05-23 02:57


전차군단. 독일 축구대표팀의 별명이다. 강하면서도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독일 축구는 군대처럼 엄격한 규율과 서열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유럽 축구의 강자로 군림해 왔다. 독일은 ‘삼바군단’ 브라질과 함께 역대 최다인 7차례 결승에 진출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1945년 5월 패망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서독과 소련연방이 점령한 동독은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는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축구에 열광했던 독일인들은 1945년 10월 남독일 축구연맹을 결성했다. 다음달엔 리그가 정식으로 개막했다. 연합군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병사들이 속속 풀려나 선수로 투입됐다. 당시 서독 국민들은 나치 체제하에서 강요당했던 집단행동이 몸에 배어 있었다. 더욱이 선수들도 군인 출신들이 다수여서 자연스럽게 규율과 복종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축구’ 문화가 생겨났다.

1950년 1월 서독축구연맹이 활동을 재개하고 1950 브라질월드컵 출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등은 독일의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제재는 1950년 9월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 풀렸다. 1954년 마침내 서독 대표팀은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서독을 약체로 분류했다. 그런데 체격이 좋고, 감독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게르만의 혼을 강조한 나치즘 영향을 받은 서독 선수들은 돌풍을 일으켰다.

서독은 결승전에서 3년간 40연승을 기록 중이던 당대 최강 헝가리와 만났다. 서독이 이기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서독에 행운이 찾아왔다. 결승전 당일 비가 내린 것. 서독 선수들은 바닥에 볼트와 너트를 장착할 수 있는 최신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고 있었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그라운드에서 구식 축구화를 신은 헝가리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서독 선수들은 펄펄 날아다녔다. 결과는 서독의 3대 2 승리. 이른바 ‘베른의 기적’이다.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이변 중의 하나인 이 사건은 2003년 영화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뒀다.

독일 축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69)다. ‘리베로’ 포지션을 최초로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베켄바워는 세 차례 월드컵에 선수로 출전해 우승(1974년)과 준우승(1966년), 3위(1970년)를 모두 경험했다.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서도 우승(1990년)과 준우승(1986년)의 영예를 안았다.

2006 독일월드컵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장면들이 연출됐다. 독일인들이 국기를 몸에 두르고 길거리를 활보한 것.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한 독일에서 애국주의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독일 애국심의 부활에 세계 언론은 “드디어 독일인들의 애국심이 정상화되고 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독일 축구는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군대의 지휘관 같은 존재인 감독은 늘 스타선수 출신인 독일인이 맡았다. 감독으로서의 수명도 길었다. 독일 축구에서 경력은 계급으로 통한다. 과거 독일 축구엔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게르만 순혈주의’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엔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의 엔트리 23명 중 무려 11명이 터키, 아프리카, 폴란드, 브라질에서 이주해 온 선수들이었다. 독일은 배타적인 ‘민족 국가’에서 ‘국민 국가’로 진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축구가 수행한 역할이 적지 않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