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발바닥을 느끼며 걸어보자

입력 2014-05-23 02:23


5월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좋아 저녁 무렵 40분씩 걷곤 한다. 처음 10분간은 사무실에서 일할 때 리듬에서 못 벗어나 눈을 내리깐 채 타박타박 빨리 걷는다. 휙휙 사람들을 지나치고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첫 번째 신호등을 건널 때쯤 잠시 멈춰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일부러 속도를 늦춰 본다. 다급하게 걷던 사람들의 큰 흐름에서 내가 서서히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면 그제야 호흡이 차분해진다. 그럼 좀 더 용기를 내 발바닥이 땅에 닿는 느낌에 집중하며 걷는다. 빠른 물결 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가 된 것처럼. 하지만 남들이 볼 때는 흡사 휘적휘적 걷는 좀비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걷다 보면 늘 다니던 동네인데도 마치 여행자가 된 듯 새로 생긴 카페며 가게를 탐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하고, 해결 못한 일을 떠올리다 보면 다시 걸음이 빨라지기 일쑤. 그래서 가급적 걷는 동안엔 오늘 하루 중 작은 것부터 큰일까지 고마운 사람, 감사할 일들을 떠올린다. ‘예상외로’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묵직하던 발걸음이 어느새 가벼워진다. 그렇게 온전한 내가 되어 집 앞에 도착한다.

이 두 다리로 하는 단순한 움직임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일깨운다. 실내에서 굳어 있던 몸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위로 잔뜩 몰려 있던 갖은 생각과 걱정들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보낸다. 비로소 삶의 여백이 생기고 숨구멍이 열리는 것이다. 또 책상머리에서 몇 시간을 고민해도 제자리이던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실제 알프스를 걸으며 자신의 철학 주제를 포착했던 니체처럼, 걷기는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사유의 도구였다고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동안 얼마간 나는 몸과 마음이 시큰둥해져 버렸다. 버스를 타고 후다닥 집에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뜩 웅크려 있었다. 그 순간 삶이 방치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정지화면 같던 나를 다시 움직인 건 걷기였다. 버스가 오지 않은 남산순환로를 몇 십분 걷고 나니, 서서히 마음이 기지개를 켰다.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걸어라. 이를 통해 그대는 모든 발걸음마다 흔들림 없고, 자유롭고, 품위 있게 걷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오늘 저녁바람 속에 발바닥을 느끼며 걸어보라. 당신을 움직일 새로운 걸음마가 될 테니까.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