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3) 200달러 들고 유학 온 지 32년 만에 美의회 입성

입력 2014-05-23 03:10


선거의 고비는 마지막 일주일이다. 끝까지 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던지기 때문에 어떤 공격을 받을지 예상할 수 없다. 선거 참모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짰지만 불안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해는 연방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함께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의 인기가 치솟던 때였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에 클린턴 후보의 여자관계가 폭로됐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한 스캔들이 터지면서 긴장 속에 일주일이 지나갔다.

투표일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제이 킴이 유리하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나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개표를 지켜봤다. 초반부터 치열했다. 베일러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애를 태웠다. 밤 11시가 넘어 부재자 투표함이 집계되면서 내가 가까스로 상대 후보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자 선거운동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베일러 후보를 10% 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공화당 후보가 됐다.

하원의원 본선은 11월 첫째 화요일이었다. 41선거구는 공화당이 우세한 지역으로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클린턴의 인기가 날로 치솟으면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49%의 득표율로 민주당 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제치고 당선됐다.

드디어 미 연방하원의원이 된 것이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정말 기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높이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충북 옥천 유세장을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이 ‘미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며 나를 소개하자 수많은 관중이 너도나도 악수를 청하려 달려들었다. 한국인 핏줄이라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1993년 1월4일. 위풍당당한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 섰다. 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열정이 펄펄 넘쳤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32년,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내가 연방하원의원이 되어 등원하는 첫날이었다. 내 가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와 숫자 ‘103’이 새겨진 의원 배지가 달려 있었다. 103차 의회라는 뜻이다.

나는 선서를 하기 위해 토머스 폴리 하원의장 앞에 섰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원의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들었다.

“당신은 미국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직무를 훌륭하고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도 마음속으로 고백했다. “주님, 저와 함께 동행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등원 첫날 곧바로 103차 본회의가 속개됐다. 첫 안건은 5개 자치령과 워싱턴DC가 국회에 파견하는 대표들에게 하원의원과 동등한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올랐다. 의원선서를 한 지 불과 40분 만이었다. 안건에 대한 반대 발언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는데, 공화당 의원들 모두가 일어나 내 이름을 연호했다. “제이 킴! 제이 킴! 제이 킴!”

이튿날 아침 미국의 유명한 신문마다 아시아인 초선 의원의 의사발언을 박스기사로 실었다. 덕분에 김창준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내가 등원 첫날부터 민주당의 표적이 된 줄은 미처 몰랐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