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기업 구조조정의 명암

입력 2014-05-22 02:39


익히 알려진 중국 고사를 예로 들어보자. 전국시대 제나라의 맹상군에겐 풍환이란 식객(食客)이 있었다. 맹상군은 어느 날 “돈을 빌려간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아오라”며 풍환을 자신의 영지인 설 땅에 보냈다. 그러나 설에 도착한 풍환은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대출 증서를 모아 불태워버렸다. 맹상군은 격노했다. 풍환은 이렇게 얘기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을 협박해 돈을 거둬들이려고 하면 그들은 살던 곳에서 도망쳐버리고 말 겁니다. 그러면 원금이고 이자고 아예 없어지는 겁니다. 맹상군이 주민들에게 눈곱만큼의 인정도 베풀지 않는다는 평판이 퍼진다면 이보다 면목없는 일이 있겠습니까.”

1년 뒤 맹상군은 파면을 당해 설 땅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설 땅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리 밖까지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맹상군은 풍환의 깊은 뜻을 알았다. 풍환은 이를 교토삼굴(狡兎三窟·똑똑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이라고 얘기했다.

기업들의 교토삼굴

요즘 기업들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바람을 보면서 맹상군의 고사에서 두 가지를 느낀다. 미래의 위험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궁지에 빠진다는 것과, 극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벼랑끝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기업들은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는 쪽과 당하는 쪽으로 갈려 있다. 덩치가 크고 돈이 있는 기업들은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비한 사업구조 개편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학습효과도 있다. 돈이 풍부한 삼성도 핵심 계열사 인수·합병(M&A)을 단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 구도를 위한 포석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중복 사업을 정리해 군살을 빼고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니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현대차 포스코 KT 등 탄탄한 기업들도 “지금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채권단 주도의 선제적 구조조정을 당하는 기업들은 벼랑끝에 선 심정으로 살을 도려내고 있다. 현대그룹은 일단 돈 되는 것부터 팔아 현금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다. 현대증권 등 금융계열 3사와 현대상선의 LNG 운송사업, 각종 지분, 부산 땅까지 팔려고 내놨다. 동부그룹은 동부제철 인천공장과 동부당진발전, 동부익스프레스를 내놨고 한진그룹도 비슷하다.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최근 대성 대우건설 동국제강 한라 한진중공업 현대산업개발 등 6곳을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 대상에 추가로 올렸다. 지금 경제 상황에선 얼마나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 대상에 오를지 모른다.

벼랑끝 기업 처지도 살펴야

일단 구조조정이란 도마에 오르면 기업은 채권단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업의 미래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우선 팔리는 것부터 매각해 채권단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동안 경영을 잘못해서 빚더미에 올랐으니 가재도구 다 내놓고 몇 개만 돌려 달라고 하소연해야 하는 처지다. 역으로 채권단은 선제적으로 개입해 더 큰 부실을 막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기업들 사이에선 ‘왜 우리만 구조조정 대상이 돼야 하느냐’ ‘기업 사정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관치금융이 아니냐’는 불평도 들린다. 기업들은 미래 성장동력까지 팔고 나면 나중에 뭘 먹고사느냐는 불안감도 섞여 있다. 과거 외환위기 때 앞뒤 따지지 않고 구조조정을 했다가 헐값에 팔았던 기업을 비싸게 되사왔던 트라우마도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 기업 구조조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식솔 수만명이 달려 있는 기업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을 할 때는 성급함이 없는지 해당 기업 입장에서도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실을 미리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직원의 밥그릇까지 차버리는 우를 범한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다.

노석철 산업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