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朴 대통령 담화 이후] “왜 하필 또 우리 때야”… 패닉 빠진 ‘모르모트 세대’

입력 2014-05-21 03:35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공무원 임용 절차 개편 방향을 제시할 때 고시생 정지연(가명·25·여)씨는 외마디 탄식을 뱉어냈다. 정씨는 행정고시 1차 시험에 낙방한 뒤 다음을 기약하며 계획을 정비하는 중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헤맸던 지난 몇 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하필 또 우리 때야.’

‘모르모트(marmotte·실험용 쥐) 세대.’ 1989년부터 92년 사이에 태어나 현재 23∼26세인 정씨 세대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세대’라고 칭한다. 교육과정이나 대학입시부터 고시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가 무섭게 진로를 좌우하는 정책이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이번 공무원 임용 절차 개편안으로 한창 진로를 설계하던 이 모르모트 세대는 또 한번 ‘진로 대전환’을 맞게 됐다. 행시 준비생 다수가 7·9급 공무원 시험이나 공기업, 공인회계사, 외교원·로스쿨 진학, 취업 준비 등으로 진로를 변경할 가능성이 커 각종 수험생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정씨의 실험용 쥐 신세가 시작된 건 고교 진학을 준비하던 2004년이었다. 이때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 논술고사 세 가지를 두루 챙겨야 하는 새로운 대학입시 제도를 2008학년도 대입부터 도입한다는 정부 발표가 났다. 외국어고 진학을 준비하던 정씨는 꿈을 접고 내신등급 상대평가에 대비하기 위해 일반고로 진학했다.

그런데 수능이 발목을 잡았다. 그해 치러진 수능에 전무후무한 ‘등급제’가 도입됐다. 정씨는 주요 과목 하나에서 100점을 받았지만 80점대를 받은 친구와 같은 등급이 나왔고, 다른 과목에선 0.5점 뒤졌을 뿐인데 하나 낮은 등급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너희만 실험쥐 삼아 제도를 바로 바꾸진 않을 것”이라 위로했지만 우려됐던 문제가 전부 불거지자 당시의 등급제는 이듬해 바로 폐지됐다. 등급제 폐단을 고스란히 떠안고 원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정씨는 재수를 택했다. 정씨와 친구들에겐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대’ ‘배틀로열 세대’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정씨는 법조인을 꿈꿨지만 2008년엔 법학과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사법고시 폐지가 확정되고 로스쿨이 도입됐다. 정씨는 행정학과 09학번으로 입학했고 두 차례 사시에 실패한 뒤 로스쿨 입시에도 한 번 도전했다. 그러나 로스쿨을 통해 쏟아지는 변호사들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데다 수억원의 학비 부담까지 우려한 정씨는 행정고시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2년여 만에 행시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정씨는 “동갑내기 고시생들 사이에선 ‘우리가 태어나기 직전에 열린 88올림픽에 우리 운을 전부 소진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며 “정부 발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약사가 되고 싶었던 김모(24·여)씨는 2009년부터 수능을 통한 약대 진학이 불가능해지면서 의학전문대학원을 염두에 두고 생명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2010년 의전원을 둘러싼 잡음이 계속되더니 결국 2015년부터 사실상 의대 체제로 복귀하겠다는 결정이 났다. 첫 수능에 실패해 재수한 송모(22)씨도 2011년부터 수리영역 나형에 ‘미·적분’이 포함되면서 고등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미적분’을 공부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렵게 입학한 대학에서 올해 행정고시반에 들어간 송씨는 이번 대국민 담화 이후 이제라도 일반 기업 입사 시험 준비를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됐다.

정부의 ‘정책 수술’이 이 세대에만 가혹하리만치 거듭되면서 이들의 경쟁 피로도 쌓여가고 있다. 앞뒤 세대보다 훨씬 치열하고 불안정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모르모트 세대는 276만명에 달한다.

모르모트 세대

1989∼1992년에 태어난 자칭 ‘저주받은 세대’. 널뛰는 입시제도·진로 관련 정책에 실험용 쥐처럼 휘둘린 세대를 뜻한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