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존재의 샘

입력 2014-05-21 02:08


도시의 초여름, 하오의 거리를 느릿느릿 걷는 맛도 특별하다. 일체의 약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런 시간, 딱히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되어, 양말을 가득 걸어놓은 리어카들도 들여다보고, 여배우의 고혹적인 눈매가 야릇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도 들여다보며, 수많은 약병들이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약방도 지나서 놀랍도록 짧은 치마의 아가씨와 주렁주렁 이어폰 줄을 걸고 있는 총각들, 안경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안경가게, 온갖 빵들이 둥글게 거리를 물고 있는 빵집, 온갖 색깔로 유혹하는 구둣가게, 옷가게… 대리점들, ‘폰이 공짜, 공짜, 온통 공짜’라고 쓴 스마트폰 대리점들, 그 가게들에서 울려나오는 노랫소리들, 외로움으로 비비 몸을 트는 노랫소리들, 그 노랫소리들은 ‘당신은 대리점이에요, 당신의 존재의 대리점이에요, 당신의 유전자의 대리점이에요, 당신의 옷이 당신의 대리인이 되고 있듯이, 당신의 명품가방이 당신의 대리인이 되고 있듯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다 우아한 대리석의 계단과 만난다. 그 끝에는 마치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이라도 서 있을 듯하다. 어떤 성의 정원에서 솟구치고 있던 분수도 있다. 백화점이다. 백화점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느릿느릿 걷는다. 거기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으며 그 흔한 벽시계 하나도 없다. 아득히 넓은 홀, 사람들은 갑자기 이름들이 없어진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해진다. 라벨에 붙은 값만이 실체이다.

그때 느릿느릿 판매대를 들여다보며 걷고 있던 나에게 알지 못할 ‘근질거림’이 온다. 이곳이 지하이므로, 벽이므로, 시계가 작동하지 않는 웅덩이이므로 날고 싶은, 날아 달아나고 싶은, 아마 ‘날개’라는 소설을 쓴 식민지 시대의 작가 이상도 그때 처음 생긴 ‘화신 백화점’을 거닐며 이랬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시절 식민주의의 첨병으로 왔을 ‘화신 백화점’ 건물 옥상에 서서 ‘날개야 돋아라’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소설에서라도 그런 꿈을 펴 보이지 않았을까.

다시 확인한다. 꿈은 현실에서 가망이 없기에 꿈이다. 손에 잡히지 않기에 그것은 한없이 아름답다. 아무리 거듭 외쳐도 옳은 그것. 도시를 느릿느릿 걷는 오후 아마 이 오후도 내 손에 잡히지 않으므로 아름다우리라. 날지 못하기에 이상의 ‘백화점 옥상에서의 비상’이 눈물나게 아름답듯이. ‘네가 서 있는 그곳을 파헤쳐라! 그 아래에 샘이 있다!(니체)’ 아, 존재의 샘, 잡히지 않는 그곳을 찾아서.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