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1) 1992년 LA 흑인폭동 “최선 다해 시민을 지키자”
입력 2014-05-21 02:13
1991년 11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LA 지역의 공화당원들이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 중 한 명이 대뜸 물었다. “다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습니까?” 나는 이미 주 하원의원 출신의 척 베일러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후였다.
“아, 아직 모르시는군요. 제이 킴의 다이아몬드바 시는 새로운 선거구가 됐습니다. 현직 의원이 없는 신생 선거구이니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 2개 선거구가 더 생기게 됐는데, 그중 한 지역구에 다이아몬드바 시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공화당 후보를 물색하다 보니 다들 변호사와 정치가뿐이더군요. 미국은 이민의 나라입니다. 당신은 맨주먹으로 미국에 와서 사업을 일구고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공화당이 찾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바로 당신입니다.”
너무나 큰 제안이었다. 연방의원 선거는 시의원이나 시장 선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주 의원도 거치지 않았는데 연방의원 선거에 출마하라니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인구 8만명인 작은 도시의 시장 선거와 65만명을 대표하는 연방의원 선거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새로 생겼다는 41선거구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주민들의 소득 수준과 인구분포 등을 따져보니 공화당 후보가 된다 해도 확실히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가 언제 또다시 오겠는가. 그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서재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이미 출마하기로 단단히 결심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심했다. 의논해봤자 날더러 미쳤다고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순식간에 닥친다.
1992년 4월 29일. 경찰서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골치 아픈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경찰서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LA 다운타운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다이아몬드바 시도 어서 빨리 대책을 세우십시오.” 우리 시는 LA에서 약 40㎞ 정도 떨어져 있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연방의원 출마를 위해 한창 준비 중인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불평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경찰차를 타고 급히 LA올림픽가의 한인 타운으로 향했다. 이미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마치 6·25전쟁 당시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LA 흑인폭동사건의 출발은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을 백인 경찰들이 마구 때린, 이른바 ‘로드니 킹 구타사건’으로 촉발됐다. 하지만 킹을 구타한 경찰관 3명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폭동이 일어난 그날은 경찰관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날이었다.
4·29 흑인폭동은 사흘 뒤 6000명의 주 방위군이 투입되고 나서야 진압됐다. 사흘 동안 58명이 사망했고 2383명이 다쳤다. 1만2111명이 경찰에 구속됐고, 크고 작은 방화도 7000여건에 달했다.
나는 즉시 시의 경찰력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LA 경찰력만으로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경우에 대비해 이웃 도시들에도 추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폭동이 진압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다이아몬드바 시의 안전을 지키고 LA를 지원했다. 덕분에 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위기에 강한 리더십을 가진 후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 구주 아니면 서지 못하네 나를 귀히 보시고 항상 붙드네 나를 붙드네 나를 붙드네 사랑하는 나의 주 나를 붙드네.’ 감사한 마음에 찬송가(374장) 가사가 입에서 자꾸 맴돌았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