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홀로 남겨진 거동 불편 장애인들 “불 나면 답 없다”

입력 2014-05-20 03:36


지난 14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중랑구의 다가구주택 1층에서 불이 났다. 현관문이나 창문만 열어도 골목길과 바로 연결돼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뒤늦게 구출된 김이슬(가명·17)양은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다.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져 있던 김양은 다운증후군 환자다.

김양은 함께 사는 어머니와 동생이 집을 비우면 혼자 집을 지켰다.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김양의 방과 후 생활을 관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래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김양이 전화기가 있는 안방까지 기어가 간신히 누른 번호는 ‘119’가 아닌 ‘042119’였다.

김양의 전화를 받은 대전119가 서울119와 3자 통화를 시도하는 동안 불은 계속 번져 순식간에 집 전체를 휘감았다. 불길 속에 갇힌 김양은 소방차가 좁은 골목길을 헤치며 달려오는 동안 멍하니 연기를 다 들이마시고 있었다.

앞서 지난달 13일에는 서울 성동구 장애인 임시거주 시설에서 혼자 살던 중증장애인 송모(53)씨가 화재로 숨졌다. 송씨는 사고 당시 바닥에 엎드린 채로 소방대원들에게 발견됐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양과 송씨의 사고는 재난대비 취약 계층에 대한 관리 부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다. 판단력이 떨어져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하거나 거동까지 불편한 장애인들은 재난이 발생하면 생존율이 비장애인보다 훨씬 낮다. 장애인들에게는 화재 등 재난 발생 사실을 바로 알릴 수 있는 알림시스템이나 상시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부족한 재원과 미비한 법규는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불나면 답 없어” 위험천만 장애인 시설=19일 찾은 서울 강북구의 한 맹아원. 1960년대 지어진 건물 두 동이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두 건물은 지난해 건물안전점검에서 모두 최하위인 ‘D등급(위험)’을 받았다. 낡은 건물의 비상 통로는 각 층을 연결한 계단 하나가 전부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시각장애인은 71명. 이들 중 30%가 자폐증이나 지적장애, 지체장애 등 중복 장애를 앓고 있다. 대부분 혼자 힘으로는 이동이 어렵다. 근무 직원은 평상시에는 10명이지만 오후 7시 이후에는 5명뿐이다. 밤에 불이 나면 직원 1명당 최소 14명의 장애인을 대피시켜야 한다.

맹아원 관계자는 “주기적으로 소방서로부터 화재점검 및 안전 교육을 받지만 막상 불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다”면서 “화재감지기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아 불이 나면 어디서 불이 났는지 방송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 맹아원은 지난 2월 개정된 소방법에 따라 국고보조금을 모두 털어 건물 한 개 동의 1층에만 간신히 화재감지기를 달았다. 그러나 예산이 없어 제일 중요한 통로에는 화재감지기를 설치하지 못했다.

◇현실 못 따라가는 법규=현행 소방법은 장애인 시설, 아동 시설, 노인 시설 등 ‘노유자 시설’에 대해 피난도구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강기 등 피난도구들은 비장애인이 쓰기에도 버겁다. 위급상황에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피난도구를 이용해 무사히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중증장애인들에게는 활동보조 인력이 필수다. 현재 장애인복지법상 등록 1∼2급 장애인 중 조사를 통과한 중증장애인에게는 월 40∼100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된다. 그러나 사실상 장애 중증도가 2급과 별 차이가 없더라도 장애등급제에 따라 3급 이하의 판정을 받으면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장애등급제 기준을 현실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앞서 정부는 독거·취약 중증장애인 가구의 응급안전 서비스 지원을 위해 올해 예산 63억원을 배정했다. 집안에 화재감지기 등을 설치해 응급 상황 발생시 소방서 및 응급안전 서비스 지역센터와 연계해 돕는 서비스다. 그러나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이 40만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정부의 지원 대상자는 1만명에 불과해 ‘보여주기식’ 대책이라는 지적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예 사비를 내고 사설경비업체의 출동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달에 5만∼10만원 선인 출동 서비스는 목걸이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경찰과 경비업체가 바로 출동한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자 비중이 높은 중증장애인들에게 월 5만∼10만원은 큰 부담이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