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10) 최초의 한국인 시의원 당선 2년 만에 시장까지

입력 2014-05-20 02:36


선거 기간 중 8차례 토론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단순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정부와 개인기업이 공조해서 작지만 효율 높은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세금 부담을 확실히 줄이겠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일해 온 저의 경험과 노하우로 가장 합리적이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이민자인 내가 변호사 출신이 낀 다른 후보들과 토론을 벌여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만의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순하라.’ 선거일까지도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역신문 기자들도 나를 제외한 후보들과만 인터뷰를 했다. 개표가 시작되자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내 눈을 의심케 했다. 2위보다 무려 1000표나 많았다. 밤 11시쯤 승리가 확정되자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던 한인은 3명. 그중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주미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이튿날 한국 신문과 방송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날 이후로 내 이름 앞에는 ‘최초의’ ‘유일한’이란 수식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시는 두 가지로 나뉜다.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큰 도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장이 모든 행정을 책임진다. 하지만 대부분 작은 도시들의 시장과 시의원들은 자기 직장이 따로 있다. 그들은 시의회에서 결정권만 갖고 있으며 시 운영은 시티 매니저에게 맡긴다. 다이아몬드바시도 그랬다. 나는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운영하는 한편 매주 화요일 시의회에 참석했다.

시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된 지 1년 반 만에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이아몬드바 시장은 2년마다 5명의 시의원 중에서 뽑는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어 또 다른 시의원 3명은 물론 나와 경쟁하려던 시의원까지 설득해 만장일치로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 2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인 최초의 시장 당선이었다.

시장이 되고 나서 정말 바빴다. 아침 8시면 집무실로 향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시장 업무를 본 후에 제이킴 엔지니어링으로 출근했다. 파트타임 시장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료는 600달러에 미달했다. 말 그대로 봉사활동인 셈이었다.

공약대로 나는 작은 정부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청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없애고 빌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시장실도 책상 하나 겨우 놓일 정도로 좁은 방을 빌려 썼다. 시의회도 별도 건물 없이 카운티의 환경부 회의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 공무원 채용도 중단했다. 다이아몬드바시와 같은 규모의 시를 운영하려면 통상 150명 정도의 공무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파트타임 직원 2명을 포함, 모두 24명의 공무원만 운용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 1000만 달러의 예산을 줄일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 와보면 너무도 멋지게 지어진 구청이며 시청이 즐비하다. 몇 천억원을 들여 지은 호화청사라고 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부채 액수가 엄청나다. 그 돈이 자기 것이라면 엄청난 부채를 떠안으면서 그렇게 지을 수 있을까. 지역주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구의회나 시의회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이아몬드바시는 효율적인 재정관리로 흑자를 냈고 은행에 상당한 액수를 저축할 수 있었다. 또 경찰서를 두지 않고 매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경찰과 계약을 맺고 외주를 줬는데 여기서도 상당한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