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칼럼]연변과기대 안병렬 교수-내가 만난 빨치산
입력 2014-05-19 10:35 수정 2014-05-19 10:36
빨치산이란 말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널리 쓰이었는지 모르나 내가 어릴 때에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저 빨갱이라고만 불렀다. 말하자면 오늘날 흔히 쓰는 빨치산인 것이다. 하기야 빨치산의 본뜻은 게릴라와 같다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런 게 아니고 산으로 쫓겨 간 빨갱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 빨치산을 만난 것이다.
해방된 지 2년인가 3년인가였다. 1947년, 혹은 1948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듬해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 열하나나 열두 살쯤 되었을 게다. 그때는 이른바 빨갱이들이 대개 쫓기어 산으로 들어간 때였다. 그러나 이들은 밤이면 그 산으로부터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려 내려와 양민들로부터 약탈하니 이들의 행패가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산골 마을들은 낮이면 태극기를 달고 밤이면 인공기를 달아야 하는 웃지 못할 기구한 삶에 허덕여야만 하였다.
아버님은 이들을 피하고 또 형과 우리를 공부시킨다고 경주읍내로 이사를 하셨다. 우리 큰 집은 멀리 대구에까지 나가 사셔야만 하였다. 꽤 부자로 이름이 나 있었던 터이라 목숨마저 위태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집은 이 밤손님의 피해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고향 마을의 소식은 늘 참담하였다. 밤에 나타난 이 빨갱이들에게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그 이튿날이면 또 경찰지서에서 순경들이 와서 왜 주었느냐고, 빨갱이들에게 협조하였다고 욱박지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난한 농민들이 다 도시로 도망쳐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기가 차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현장을 내가 보았으니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해 여름인지 가을인지 기억이 아리송하다. 외가엘 갔다. 왜 갔는지는 모르겠다. 외가는 경주에서 북쪽, 포항 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강동면 모서리 서당골이라는 동네였다. 외가는 그 마을에서 종가이며 또 꽤 부자인지라 빨갱이들의 표적이 되므로 외삼촌 내외분은 일찍이 경주읍내로 피해 나와 사시고 외할머니 한 분만 집을 지키고 계셨다. 그러나 외삼촌은 농사며 집안일을 돌보시랴 낮이면 거의 촌 집에 오셨다가 오후엔 일찍 읍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던 차 제삿날이 다가왔다. 아무리 무서운들 제사야 안 지낼 도리가 없으니 외삼촌은 모처럼 밤에 집에 오신 것이다.
그래도 무슨 예감이 있었던지 일찍 파하고 어디론가 나가셨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빨갱이들이 들이닥쳤다. 아마 마을에 끄나풀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고서야 그들이 어찌 그리 잘 알랴? 어린 나는 일찍 잠이 들어 제사 지내고 외삼촌이 피해가고 하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자다가 밖이 떠들썩하기에 잠이 깨었다. 밖에 웬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 같았고 할머니는 마루에 나와 계셨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엉금엉금 기어 할머니 곁으로 갔다. 할머니 곁에 웬 낯선 사람이 축담에 서 할머니와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 같은 게 나기에 보니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는데 자세히 보니 도장에서 곡식 가마니를 끌어내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미 체념을 하셨는지 그냥 가만 보고만 계셨다.
축담에 선 사람이 나를 보더니 누구냐고 물었다. 외손자라고 하셨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너 외삼촌 어디 가셨느냐고 하였다.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외할머니가 이제 일어나는 아이가 어찌 알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다음 다른 사람이 와서 또 달라면 줄 것도 없고 어쩌느냐고 하니 그 사람 대답이 우리가 와서 다 가져갔다고 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누군지 물으면 뭐라고 할까 하니 그 사람 웃으며 “안경다리 하나를 실로 맨 사람이라면 안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자세히 보니 정말 안경다리 하나가 없이 실로 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다시 할머니에게 저 외양간 문 열쇠도 달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펄쩍 뛰면서 그럼 농사는 어떻게 지으라는 것이냐며 대들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농사를 지어야 이다음 당신들도 먹고 살 게 아니냐? 제발 소만은 두시오.” 그리고는 “그 열쇠는 나한테 없소.” 하셨다. 그랬더니 “안 되겠군.” 하더니 갑자기 나를 보고 “야, 너 가서 네 외삼촌 데려 와.” 하는 것이다. 나는 벌벌 떨면서 할머니에게 구원의 눈길을 주는데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소 있는 외양간만 보신다. 별수 없이 나는 뜰로 내려섰다. 안마당을 지나 바깥마당을 거쳐 대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긴 칼을 들고 앞을 막아서며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그의 손에서 번쩍이는 긴 칼, 그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데 그 섬광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나중 들은 이야기인데 그 칼은 이른바 “닛본도”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 소리도 아무 말도 못하고 떨고만 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외삼촌 찾으러 간다고 하였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더니 조금 뒤에야 가라고 하였다. 아마 그 동안에 연락이 된 모양이었다. 긴 골목으로 내려가는데 곧 뒤에서 그 칼날이 나를 내리칠 것 같은 두려움에 제대로 걸어지지를 않았다. 조금 뒤에야 제대로 걸을 수가 있었는데 이번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다. 곧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은데 갈 곳은 없었다. 그런데 또 어인 일인지 개들은 어이 그리도 극성스레 짖어대는지? 나는 오른 쪽 산으로 도망칠까 하다가 그래 잡히면 도망가는 게 되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래 별 수 없이 외가의 작은댁으로 갔다. 개들이 하도 짖으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문을 열고 내다보셨다. 나는 와락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에게 안기어 울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겪은 이야기를 하였다. 할머니는 괜찮다며 꼭 껴안아 재워주셨다. 이튿날 아침 늦게야 외가로 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는 듯 태연히 긴 담뱃대를 물고 계셨다. 다음 순간 나는 외양간을 보았다. 그대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는 빨갱이도 이기는 분이라 생각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빨치산 두목이 왜 나더러 외삼촌을 데리러 보냈는지 모른다. 정말 내가 외삼촌 있는 데를 안다고 판단하여 내가 외삼촌을 데려 오리라 믿었는지 아니면 내 가는 곳을 따라와 외삼촌을 잡으려고 그랬는지 지금도 그 사정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쪽 안경다리를 실로 맨 그 빨갱이 두목이 지금도 이웃 집 농부 아저씨 같이 아주 훈훈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남의 재물을 약탈해간 그 도적이 왜 그렇게 훈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아마 그가 끝내 소를 빼앗아가지도 않았고(그가 소를 빼앗아가려면 그까짓 열쇠가 문제이겠는가?) 또 할머니에게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갈 때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갔다고 해서 그런가? 그보다 그의 몸에 배인 훈훈한 인정이 겉으로 나타난 탓이리라 짐작한다.
비록 그들이 도적이긴 하나 그래도 자기대로의 이념을 가진 의적이라 몸에 배인 인격의 냄새가 드러났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에게도 어느 환경, 어떤 처지에서도 은연 중 나타나는 그런 훈훈한 냄새가 있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없는 것 같다. 그 도적만한 인격도 갖추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참으로 부끄럽다.
안병렬 연변과기대 한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