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두렵다
입력 2014-05-19 02:33
그해 5월. 팔당에서 친구와 뱃놀이 중이었다. 부드러운 바람과 흰 구름 드문드문한 하늘에 넘실대는 강물. 노를 젓고 있는데 저 위 45번 국도를 울리며 무장군인을 태운 군용트럭과 전차가 줄줄이 오래도록 지나갔다. 전쟁?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왔다. 완전무장한 군부대 행렬이 서울의 봄을 끝내는 서곡임을 그제야 알았다. 그 후 신부님이 보내준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 3권을 심장 떨며 보던 날이 기억에서 흐려질 만큼 시간이 지났다. 34년. 길다면 긴 시간인데 당시 광주에서 실종된 가족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기사를 읽는다. 그 아들과 딸, 혹은 젊은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세월호 참사 한 달이다. 결과는 인명구조 0명이다. 정부와 관계기관의 무능과 부실대응 속에서 단원고 교감선생님을 비롯해 비겁하게 행동한 교사는 단 한 분도 없었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다들 괜찮니?” 선생님의 휴대전화 문자가 귓가까지 생생하며 따뜻하다. 안전한 데 있던 교사들도 오로지 학생을 지키기 위하여 아이들에게로 달려가 희생됐다. 기간제 교사와 ‘아이들 구하러 가야 돼’라던 양대홍 사무장, 선원 박지영씨도 다르지 않았다. 정부는 진상 규명과 처벌은 물론 교사와 학생 그리고 일반인 희생자 전부를 최소한 의사자로 지정하여 예우해야만 한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처신으로 일관한 정부가 그나마 사죄로서 말이다.
실종자 숫자가 줄어들며 언론은 때마다 보도한다. ‘남은 실종자 수는 19명’ 식으로. 받아쓰는 언론은 숫자를 책임질 수 있는지. 잠수사는 먹다 만 우윳병을 봤다지 않은가. “어휴 아기 울어” 하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동영상에 있으며 자기 아이에게 입히려고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들고만 있던 젊은 엄마의 영상도 남아있다. 화물칸 차 안에도 몇 명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승선인원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실종자 수를 명확하게 대다니 어불성설이다. 이름도 모르는 채 진도 앞바다 속 펄에 묻히거나 조류에 쓸려 사라질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정부도 언론도 별로 언급하지 않는 지금이 두렵다. 어디쯤이 마지막 한 사람인지, 그중 누군가가 34년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그게 누구인지 모를 일이 두렵다. 실종자 숫자가 줄어들면서 이 참사를 세인이 슬슬 잊을까봐 두렵다. 정부가 약속하고 그 책임을 다할 때까지 두려울 것 같다. 실종자 가족의 마음이 그럴 것 같듯이. 그래서 아직 이런 글을 쓴다.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