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內소통 ‘익명게시판’이 뜬다] 회사·상사 불만 꾹 참는다? ‘익명게시판’ 키패드를 꾹 누른다!
입력 2014-05-17 03:23 수정 2014-05-17 14:51
작은 벤처 회사를 다니다 대기업으로 이직한 직장인 A씨는 요즘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좀 더 번듯한 직장을 원하는 부모님 기대 때문에 이직을 감행했지만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너무 답답하다. 주말 출근은 일상이고, 그나마 대화가 통하던 상사는 얼마 전에 회사를 떠났다. 불만이 쌓이지만 고민을 털어놓을 통로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그는 “사장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는 회사에 다니다가 이런 문화에 적응하려니 힘들다”고 토로했다. 우울한 A씨는 작은 IT 업체에 다니는 후배가 메신저에서 던진 한마디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니, 우리는 불만 있으면 보는 데서 바로 얘기해.”
“나도 그러고 싶다. 그걸 누가 몰라서 안 하니….” A씨는 이렇게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만에 귀 기울이지 않은 스키야의 교훈
일본 대형 덮밥 체인점 ‘스키야’(すき家)는 지난달 17일 직원 근무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평소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으로 악명이 높았던 스키야가 처우 개선을 약속한 것은 최근 벌어진 아르바이트 집단 퇴사 사건 때문이다. 스키야는 지난 2월 1개월 한정으로 ‘소고기 나베 정식’을 내놨다.
다른 음식보다 조리시간이 더 걸리는 이 메뉴까지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불만의 목소리는 일본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인 ‘2ch’에 개설된 익명게시판에 하나둘씩 올라왔다. 뜻을 모은 이들은 같은 날 출근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급기야 스키야 매장 123곳이 문을 닫는 등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회사 측은 대책을 마련했다. 스키야는 “신상품 도입에 따라 직원 부담이 커진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점포의 노동 환경 개선을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비슷한 비난을 받았던 유니클로도 최근 3만명의 아르바이트 및 임시직 직원 중 1만6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두 사례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력난이 대두되고 있는 일본 내 여건이 본질적인 이유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익명게시판을 통한 집단행동이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부 구성원의 불만을 조직이 경청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익명으로 소통 원하는 직장인들
요즘 일부 IT기업 직원들 사이에서는 ‘블라인드’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이 관심을 끌고 있다. 회사 별로 익명게시판이 있어서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앱이다.
LG전자 네이버 다음 티켓몬스터 쿠팡 넥슨 엔씨소프트 카카오 SK플래닛 등의 익명게시판이 개설돼 있다. 직원만 사용하도록 회사 이메일로 인증을 한다. 블라인드를 만든 업체 팀블라인드에 따르면 네이버의 경우 전체 직원의 80%, 다음과 넥슨은 60% 정도가 블라인드를 사용하고 있다. 티몬 쿠팡 등은 거의 전 직원이 블라인드를 찾는다.
정영준 팀블라인드 대표는 16일 “우리나라는 수직적인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IT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면서 “소통이 잘 되던 조직도 규모가 커지면 소통에 간극이 생기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화 창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블라인드는 요청이 많은 회사부터 게시판을 열고 있다. 다른 기업에 비해 수평적인 기업 문화를 갖췄다는 IT 기업의 수요가 많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블라인드는 1000~5000명 규모의 회사가 익명게시판을 가장 활발하게 사용한다고 강조했다. 한 회사에서 100명 이상이 게시판 개설 요구를 하면 연다는 원칙을 세웠다. 충분한 수가 모인 상태로 시작해야 게시판이 활성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블라인드가 인기를 끌면서 유사한 서비스가 속속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직장평가사이트 글래스도어와 유사한 ‘잡플래닛’이라는 서비스도 나왔다. 재직 중인 회사에 대한 평가를 익명으로 올려 공유한다.
맛집부터 노조 설립 문제까지
블라인드는 자유게시판인 ‘속풀이’, 회사 근처 맛집 정보를 공유하는 ‘주변 맛집’, 회사 주요 소식을 모은 ‘주요 뉴스’ 등 3가지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IT 기업이 밀집한 경기도 판교·분당 지역 회사가 많다 보니 인근 맛집 정보 공유가 많다. 직원 인기투표도 주목받는 게시물 중 하나다.
네이버 익명게시판에서는 최근 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간 것으로 전해졌다. 높아지는 업무강도와 복지 혜택 변경 등에 불만을 느낀 직원들이 노조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호응을 얻으면서 여론이 형성됐었다.
블라인드는 인신공격이나 음란성 글 등 악성 게시물이 올라오면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글이 일정 횟수 이상 올라와도 차단된다. 하지만 이런 장치는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정 대표는 “익명게시판이지만 같은 회사 사람들이 쓰기 때문에 서로 지키는 선이 있다”고 설명했다.
익명성보다 중요한 건 소통 문화
블라인드에 익명게시판이 있는 회사 중 카카오는 좀 특별한 경우다. 직원 절반 이상이 가입했고 재방문율도 80%가 넘지만 다른 회사보다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다.
카카오는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안에서 해결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카카오 관계자는 “우리의 지향점은 ‘갈등을 조장하는 문화’다”며 “서로 의견을 내고 부딪치는 게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익명게시판에 회사 운영에 관한 민감한 글이 올라오면 “이런 얘기는 ‘아지트’에서 합시다”라는 댓글이 달린다. 아지트는 카카오의 내부 커뮤니티 게시판이다.
카카오는 매주 수요일 임직원 전체회의를 연다. 순서 중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코너가 있다. 직원들은 어떤 질문이라도 할 수 있고 임원들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 질문자는 실명을 밝히는 게 원칙이지만 원하는 경우에는 익명으로도 할 수 있다.
임원들은 “청문회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지만 질문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조직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투명한 정보 공유와 소통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