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실버 라이프] 연금 받으며 편히 누~려? 내 아까운 재능, 나눠야죠… ‘타이거 박’ 박운서 선교사
입력 2014-05-16 18:04 수정 2014-05-17 02:39
‘타이거(Tiger) 박’으로 불렸던 정통 경제관료 박운서(75). 숱한 통상 현장에서 호랑이 같은 기백으로 협상을 주도했다. 제1대 통상산업부 차관을 역임하고 한국중공업, 데이콤 사장 등을 맡았다. 2005년 초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을 때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다. 대학 총장, 국회의원, 기업 대표…. 그에겐 ‘명예’를 택할 탄탄한 이력도 있고 ‘휴식’을 취할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그는 2005년 7월 돌연 선교지로 향했다. 예순다섯 나이에. 박 장로는 10년째 태평양 민도르섬에서 필리핀판 불가촉천민 망얀족과 살고 있다. 함께 농사짓고 예배드린다. 노년의 평안은 ‘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를 서울 서초구 양재천로 예수선교교회(김에스더 목사)에서 최근 만났다. 밝고 활기찼다. 뿜어내는 에너지는 ‘청년 선교사’였다. 하얀 머리칼만이 희수(喜壽)에 가까운 나이를 짐작케 했다. 예수선교교회를 통해 그를 후원하는 아내 김에스더(73) 목사가 동석했다.
“이제 나이가 65세인데 어떻게 제가 거길 갑니까?”
“지난주 제가 세운 필리핀 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왔어요. 김종실 선교사가 필리핀 현지어 타갈로어로 설교를 했어요. 다들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울음바다’가 됐어요. 예배 중 누군가 저를 붙잡는 바람에 제가 넘어지기도 했어요. 하하.”
박 장로는 10∼13세 망얀족 어린이를 대상으로 음악학교를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찬양과 율동 시범을 보였다. 손을 높이 들고 한 발로 뜀뛰기를 했다. 혀를 내밀고 폴짝폴짝 뛰기도 했다. 김 목사는 그 모습이 익숙한지 “남편은 애들이랑 같이 찬송하고 율동해요. 열정이 참 대단해요”라며 웃었다.
-퇴임을 앞두고 금식기도하던 중 필리핀 망얀족에게 가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셨다면서요.
“전 그 명령을 거부했죠. 경기도 양평에 전원주택 부지도 봐뒀고, 골프나 치면서 노후를 즐기려 했어요. 선교야 헌금을 내면 된다고 생각했고요.”
2003년 부부 동반으로 필리핀 골프 투어를 갔을 때 처음 망얀족을 만났다. 마닐라에서 항구까지 2시간 버스를 타고 3시간 배를 탔다. 민도르섬에서도 다시 2시간 버스를 타고 3시간 걸어가야 하는 오지였다. 망얀족은 밀림 속에서 바나나 등을 따 생계를 유지하고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다. 씻지 않아 피부가 뱀 껍질 같고 악취가 났다. 필리핀에서도 산속 망얀족은 미개하다고 천대받았다.
“제 나이가 65세나 됐는데 어떻게 가냐며, 그곳은 늙은 사람이 못 산다면서 하나님께 저항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갈렙(수 14:6∼15)은 85세에 헤브론 산지를 개척했다며 제 등을 떠미셨죠. 왠지 망얀족 아이들의 눈망울도 떠오르고요. 사랑의 마음도 주셨죠.”
세 아들을 키우던 아내는 마흔 즈음부터 신학을 공부했고 10여년 전 안수를 받았다. 박 장로의 필리핀행에는 아내의 오랜 기도가 있었다. 김 목사는 “선교 사명을 가지고 계속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이 남편을 통해 이 일을 하도록 하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강도에게 무릎 꿇은 뒤 ‘성령의 선물’ 300여 성구 암송
박 장로의 외조부는 목회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1958년 서울대에 입학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79년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타이거 박이란 별명은 어떻게 얻으시게 됐나요.
“80년대 일본과 통상 협상을 할 때 제가 실무 국장이었어요. 그때 일본 인사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해서 제가 테이블 재떨이를 들었다 놨는데 그게 깨졌죠. 일본 측 실무자가 니혼케이자이신문에 ‘한국에서 호랑이 같은 사람이 와서 이번 협상이 아주 힘들다’고 인터뷰했죠.”
그는 민도르섬의 땅 16만㎡을 사고, 농사를 지었다. 망얀족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2007년부터 인부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이앙법을 쓰면서 수확량이 늘었다. 연간 2.5모작으로 평균 4000가마의 쌀을 수확했다. 400가마는 교회 개척과 교육생을 위해 사용했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필리핀에 계시면 힘들지 않은가요.
“외롭고 힘들죠. 게다가 필리핀은 치안이 안 좋아요. 500페소(1만원) 때문에 총을 겨눠요. 2008년 3월 강도들이 집에 들이닥쳤어요. 제 양손과 양발을 묶고 돈을 훔쳐 달아났죠. 며칠 뒤 강도 허깨비가 보였어요. 딱 돌아오고 싶었지요.”
-어떻게 견디셨어요.
“이때부터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어요. 새벽 4시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오후 5시에 집을 돌면서 중보기도를 하고, 밤 9시에 감사 기도를 했어요. 말씀에 갈급함이 생겨 성경 구절을 외우기 시작했고요. 지금 신약 265구절, 구약 50구절을 연이어 외워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해소됐어요. 이게 은혜죠.”(미소)
아내와는 일과가 끝나는 매일 저녁 7시쯤 전화 통화를 하고 일상을 나눈다. 아늑한 시간이다.
‘이 땅에 묻힌 언더우드처럼 필리핀 민도르에 묻히리라’
박 장로는 지금까지 호랑이 같은 끈기와 추진력으로 사역했다. 망얀족이 사는 밀림에 교회 14곳을 세웠고, 망얀족 청소년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를 로로(현지 말로 할아버지) 박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일할 때도 일에 정말 몰두했어요. 한 번은 퇴근을 했는데 이사를 간 거예요. 아내가 제게 얘기했는데 제가 흘려들었던 모양이에요.”
-현재의 선택이 후회될 때는 없나요.
“강도사건 후 하나님이 내 주인이고 난 종이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롬 8:2)이 저를 지배하는 거죠. 제가 하나님 안에서 변화하는 걸 느꼈어요. 그 전엔 전도를 해야 한다는 성과지향적인 신앙, 이것이 옳다는 율법적인 신앙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이 늙은이를 하나님 역사에 사용해주시는 게 정말 감사해요.”
-고위 공직자가 퇴직 후 산하 기관이나 협회로 가 많은 보수를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후에도 문제가 됐죠. 삶에서 중요한 건 마음의 평안인 것 같아요. 돈, 권력을 좇는다고 해서 평안이나 행복이 오지 않아요. 영원한 생명,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릴 수 있어요.”
-퇴직 연령이 낮아지고 제2, 제3의 인생을 계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과 나누는 삶, 주는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에서 가졌던 자신의 기술, 지식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전 앞으로 더 큰 농지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최근 낸 책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코리아닷컴)에 보면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120여년 전 선교사들이 조선을 보고 너무 황무한 땅이라 탄식했잖아요. 헐벗은 망얀족을 보면서 내가 어쩌면 그 빚을 갚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아내에겐 말을 못했는데 저도 언더우드가 그랬던 것처럼 민도르섬에 묻히고 싶어요.”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