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대통령만 구하면

입력 2014-05-16 02:46


직위 서열로 한국 언론계 수위를 다툴 언론인이 직을 내려놓는 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세월호 유족들의 KBS 항의 방문 17시간, 청와대 앞 연좌농성 12시간 만에 KBS 보도국장이 사임했다. 1시간 뒤에는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세월호 희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를 비교한 보도국장 발언 때문이었다.

사과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다. 수신료로만 한해 6000억원 가까이 거둬들이는 공영방송 간부라면 공적 책임감은 마땅하다. 신기한 건 변심의 속도였다. 전날 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유가족들은 KBS 건물을 향해 “사장 나오라”를 4시간 넘게 외쳤다. KBS 관계자들이 안타까워했다. 어쩌죠? 다들 퇴근하셨는데. 휴대전화 번호요? 모르지요. 보도국장이 그런 말을? 저런, 알아봐야겠어요.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의 와중에 정부가 기대 이상으로 재빨랐던 순간은 세 번 있었다. 더 있었다면 미안한 일인데 기억나는 게 그쯤이다. 진도 팽목항의 희생자 명단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던 안전행정부 국장 목을 날리는 데 하루가 안 걸렸다. KBS 앞 시위대 사건 역시 사퇴·사죄를 거쳐 24시간이 지나기 전 마무리됐다. 사고 발생 12일째, 찾아내야 할 실종자가 사망자보다 훨씬 많던 때, 국무총리는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청와대행 시위대를 막지 못한 채 진도에서 3시간 차량감금을 당한 뒤 일주일 만이었다. 야당은 “비겁한 회피”라고 비난했지만 청와대는 사의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그러므로 의문은 결국 이런 것이다. 권력 주변에서 어떤 일들은 왜 다른 일보다 재빠르게 이뤄지는가. 혹시 모를 생존자들을 위해 세월호 선체 안에 공기가 주입된 건 침몰 50시간 후였다. 시신이 유실되지 않도록 사고 해역에 그물망이 설치된 게 침몰 사고 4일째, 잠수사들이 세월호 선내에 처음 진입한 건 침몰 86시간 뒤였다. 해경은 사고 3주가 넘은 시점까지 실종자와 사망자 숫자를 7번이나 번복했다. 이제 세월호 승선자 명단은 참사의 최대 미스터리가 돼버렸다.

세월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부가 개입한 어느 대목에서도 재빨리 이뤄진 것은 없었다. 모든 일이 이렇게 늦어버렸는데,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렸는데. 이상한 일이다. 유독 어떤 일만은 절대 늦는 법이 없었다.

마법의 주문은 그날 밤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길에서 경찰에 막힌 안산의 유가족들이 공개해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스피커폰에 대고 몇 시간을 외쳐댔다. “박근혜 대통령님, 제발 만나주세요.” “박근혜 대통령님이 해결해주세요.” 사람들이 대통령을 수군댈 때, 발길이 청와대로 향할 때, 높은 이들의 목이 날아가고 빳빳하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지금 청와대 사람들의 본능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배가 기우뚱하고 있어, 침몰할지도 몰라, 누구와 함께 탈출해야하는 거지? 그들은 구명조끼 입고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귀 기울이는 승객들이 아니다. 배를 끌고 가는 선박직들이다. 생존자 명단은 그들이 정한다. 첫 번째 구조 대상은 단연 대통령이다. 언제나 옳았듯, 그들의 판단은 맞는 것일 게다. 대통령만 구하면 정치적 반격의 기회는 언제든 다시 붙잡을 수 있다. 생물학이 가르치길, 개체는 그저 DNA가 품은 생존과 번식 본능의 매개체란다. 그러니 이 정도 정치적 생존본능이야 탓할 일도 아니다. 평소라면 그렇게 너그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들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가 나있다. 참사의 한복판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다.

이영미 사회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