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아프다, 5월이

입력 2014-05-16 02:46


오월 첫 시작 유난히 햇살이 밝았다. 황금연휴라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표정도 그래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리고, 4호선 전철이 마침 안산에 다가갈 무렵엔 함께 재잘대던 후배도 나도 점점 말수가 줄었다. 초행길의 두려움이라고 하기엔, 서울에서 한 시간이면 닿는 곳. 게다가 이목구비가 이국적이었던 친구가 역에서 집까지 가다 보면 외국인들이 다가와 고향사람이라며 반가워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유쾌하게 기억하던 곳인데. 묵직하게 내려앉는 공기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고 자원봉사자들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조문 행렬의 끝자락에 서는데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유인물을 나눠주셨다. “여기까지 우리 아이를 보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언가 따갑고 뜨거운 것이 가슴에 달라붙었다. 그제야 뉴스에서만 보던 참사의 상흔들이 피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희생된 사람들과 유가족들이 팽목항이라는 어느 낯선 남쪽나라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나와 한 공기를 마시고 같은 땅 위에 서 있는 이들이라는 걸 말이다. 유인물엔 참사와 그 후에 벌어진 부조리한 구조 과정에 대한 유족분들의 통한의 외침이 담겨 있었다.

착잡해진 마음에 분향소를 바라보는데, 열 분쯤 되는 부모님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계셨다. 조문객들은 하얀 천막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유족들은 뙤약볕 아래 서 계셨다. 어떤 분이 챙 있는 모자를 갖다 주며 권했지만 몇 분은 모자를 옆에 내려둔 채 피켓을 들고 묵묵히 서 계셨다.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우리 아이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아, 무엇이 아직 생살을 도려낸 아픔도 채 가시지 않은 저들을 이곳에 서게 했을까. 무책임 속에 방치된 아이들, 생명보다 자기 이익이 먼저였던 이들의 구조 과정, 그리고 공감불능에 걸린 언론과 인사들의 연이은 망언들…. ‘거리의 치유자’ 정혜신 박사는 지금 희생자 가족들은 ‘외상후’가 아닌 ‘외상중’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무례하고 비겁한 이 사회가 그렇게 상처를 또다시 걷어차고 덧내는 것이다.

분향소 안엔 꽃같이 고운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아이들의 졸업식장으로 느껴질 만큼. “천진난만했던 우리 아이를 꼭 기억해주세요. 잊지 말아주세요.” 잊지 않기 위해, 먼저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잘못이었는지 밝히는 그 길 위에 함께 서야 한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