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기발한 건축가의 ‘크리에이티브’ 한 세계

입력 2014-05-16 02:58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글·그림 문훈/스윙밴드

거 참, 희한한 책이다. 옛날 LP판보다 조금 작음직한 크기의 빨간 정사각형 책. 이 책을 읽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강렬한 빨간색의 두꺼운 책뚜껑을 넘기자 아래쪽에 너비 14㎝ 되는 책, 위쪽에 그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책이 보인다. 그대로 90도 돌려, 조금 더 큰 왼쪽 책의 파란색 표지를 왼쪽으로 넘기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드로잉이 가득하다. 오른쪽 책의 겉날개를 젖히자 이쪽엔 짤막한 글들이 등장한다. 한글 옆엔 이를 압축적으로 소개한 영어가 같이 적혀 있다.

따로국밥도 아니고, 그림 따로 글 따로 붙어 있는 책이라니. 그래서 왼쪽 그림책과 오른쪽 에세이책의 책장을 양쪽으로 동시에 넘기며 읽어야한다. 행여 읽다가 한쪽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특히 왼쪽 그림책엔 페이지 표시도 없기 때문에 마치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아가듯 책장을 넘나들며 보던 페이지를 찾아 헤매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물론 성격 급한 독자들은 그림 따로 보고, 글 따로 읽을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을 만든 사람은 건축가 문훈(46)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진짜 괴짜’ 내지는 ‘기발한 상상력의 소유자’와 같은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건축평론가 함성호가 ‘자벌레 주택’이라고 별명을 붙인 비상주택, 재미있는 집을 만들어달라는 의뢰인의 부탁에 따라 탄생한 롤리팝주택 등 기상천외한 형태의 집을 지어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의 매일, 그림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그날 먹은 밥상 모습은 물론 만난 사람, 가본 장소, 그날 한 일, 심지어 꿈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한동안 열심히 그린 그림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기로 하고 보니, 그림과 글을 합치기가 애매해서 결국 이렇게 3단 변신 책(?) 같은 희한한 결과물이 나오게 됐단다.

그의 그림은 SF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질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탄광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호주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일까. 바위, 초원, 동굴 같은 풍경들이 기괴할 정도로 광활하고 자유롭게 펼쳐진다. 반면 짧은 글은 작업 과정에서의 고민과 깨달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는 15일 전화 통화에서 “대부분 책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새로운 형식에 열린 결말을 지닌 책”이라며 “상상력을 채워서 보면 더 좋은 책이니 독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건축 작업은 물론 책 하나 내는 데에도 이토록 창의적으로 임할 수 있는 비결은 무얼까. 그는 “많은 이들이 이성이나 논리로 억압하는 것들을 저는 개방적인 태도로 허용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가급적 (생각의 문을) 많이 열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초대작가로 선정됐다. 건축가임에도 워낙 독특하면서도 기묘하고 유쾌한 그의 드로잉을 전시키로 했다. 오는 6월 7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전시되는데 책에는 그때 전시되는 작품 40점 중 25점을 만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하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을 준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