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8) 황금알을 낳는 ‘하수처리장 건설 업체’ 창업

입력 2014-05-16 03:33


학부 공부를 하면서 진정으로 미국과 미국 사회를 이해하고 미국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학부 과정은 이방인인 내가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공부하기는 몹시 힘들었지만 내 삶의 자양분이 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토목공학은 적성에 맞았다. 이 분야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엔지니어에 적합하다는 걸 잘 몰랐다. 공학은 기준을 세우고 표준을 만드는 일이다. 모든 작업은 기준에 맞아야 했다. 나는 그런 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남가주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환경공학으로 상하수도의 물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주경야독으로 조교까지 하면서 196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으로 떠난 지 8년 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내게 박사과정을 권했지만 연구직은 내게 맞지 않았다. 미국 주류사회에 나가 당당한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마침 대학원을 마칠 무렵은 미국 전역에서 하수처리장 설치로 바쁜 때였다. 내 전공 분야인지라 좋은 직장에 금방 취직이 됐다.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던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하수처리 컨설팅 업체인 ‘제임스 몽고메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직접 회사를 차렸다.

하수처리장을 짓는 일은 주정부에서 발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으면서 업무상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났다. 하수처리장 수주를 잘 따기 위해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으며 정부에 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미국 전체에서 동시다발로 폐수처리 사업이 이어지다 보니 일거리는 쏟아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부 지역을 날아다녔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만큼 수입도 많아졌다.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느낌,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엔지니어로 왕성하게 일하면서 일본계 미국인들이 만든 아시아기업가협회(AAA)에 나가 활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을 제치고 AAA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미국의 주류사회와 소통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한인들과의 교분도 이어갔다. 한국계 교민이 늘면서 한인들을 위한 이익단체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무역업을 하던 배기성씨와 함께 1972년 한미정치협회(KAPA·카파)를 조직했다. 나는 2대 회장이 됐다. 우리는 카파의 첫 번째 사업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제리 브라운의 정치모금 파티를 열어 후원금을 걷어 줬다. 브라운은 8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했다. 당시 가장 어린 주지사였던 그는 2011년 40년 만에 또 다시 당선되면서 지금은 가장 나이 많은 주지사로 일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카파 회원들은 정치인을 후원하는 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깨달아갔다. 앞으로 미국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2세들을 위해서라도 한인들이 더 이상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지만 그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지역구민들이 스스로 뽑는 주의원, 시의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정치 모금을 통해 한인사회의 의견을 주지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걸 그때야 알았다.

당시 한인 장로교 및 침례교는 현지 활동이 왕성했다. 하지만 감리교는 활동이 없던 터라 서울의 이화여대 교목을 모셔왔다. 우리 집에서 20여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린 뒤 미국 현지인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