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업들은 왜 구조조정에 뛰어드는가… 외환위기 학습효과 “돈 안 되는 사업 접어야 산다”
입력 2014-05-15 02:09
지난달 29일 포스코는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 지분 매각설에 대한 공식 입장을 공시했다. 시장에서 계속 매각설이 돌자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다. 확정되면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포스코가 지분을 매각하는 쪽으로 조금 더 무게를 옮겼다고 해석한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포스코가 2010년 3조3724억원을 들여 인수했다. 하지만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평균 영업이익이 1500억원 규모에 불과하다. 대신 포스코는 인수를 위해 발행한 기업어음증권, 회사채 등 1조151억원을 2018년까지 상환해야 한다. 이 때문에 포스코의 사업구조 개편작업 중심에 대우인터내셔널이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지난 3월 취임한 뒤 비핵심사업을 과감히 정리해 사업구조를 효율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재계에 구조조정 바람이 어느 때보다 거세게 불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데도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을 필두로 너나없이 돈 안 되는 사업을 접거나 매각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필사적이다.
◇1997년의 아픈 기억=재계 전체로 구조조정 열풍이 번진 배경에는 경기침체, 그리고 이에 따른 기업실적 악화가 도사리고 있다. 특히 국내 제조업체의 실적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이 470개 상장 제조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970년대 연평균 30%대였던 매출증가율은 1990년대 들어 10%대로 떨어졌다. 2012년에는 4.8%, 지난해에는 3.4%까지 추락했다. 영업이익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쟁국의 제조기업들은 실적이 좋아지며 반등에 성공했다는 데 있다. 미국 제조기업의 영업이익률은 2012년 4.3%에서 지난해 6.8%, 중국은 6.6%에서 7.9%로 뛰었다. 경쟁국 기업들이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는 동안 우리는 뒷걸음질치고 있는 셈이다.
수익이 계속 나빠지면 투자에 영향을 미쳐 미래 시장 선점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실적 악화가 성장동력 약화로 직결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14일 “최근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기업도 구조조정을 세게 한다는 것이 색다른 점인데 이는 1997년 외환위기의 학습효과”라며 “당시 수익이 떨어지는 비핵심사업을 끌어안고 있다가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되거나 미래 성장엔진을 준비하지 못해 위기가 지나간 뒤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기억이 깊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최근 불고 있는 구조조정 바람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사업구조 개편에 초점이 맞춰졌다. 미리 위기상황을 대비하는 동시에 미래 성장엔진을 탄탄하게 구축하겠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또 상당수 구조조정이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아직은 안정적 수익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 더 적극적이다. 외환위기 때 정부·채권단 주도로 피동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진 것과 대조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금융위기 이후 우리 경제가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보이는 동안 산업계가 구조조정을 게을리했다”며 “지금 우리는 저출산·고령화, 장기 저성장 진입 등 여러 덫에 걸려 있는 형편이라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는 정서가 재계에 강하게 퍼져 있다”고 말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이 삼성그룹이다. 삼성은 핵심 계열사 인수·합병(M&A)을 잇따라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 삼성SDI는 제일모직을 흡수 합병한다고 발표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는 물론 에너지·자동차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재사업 경쟁력을 강화한 조치다. 지난달 3일에는 삼성종합화학이 실적이 좋지 않은 삼성석유화학을 합병했다. 삼성은 지난해 하반기 제일모직 패션사업부를 삼성에버랜드로 이관하고, 삼성SDS와 삼성SNS를 합치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그룹도 지난해 철강 계열사인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냉연사업 부문을 합친 데 이어 최근 중견 건설사인 현대엠코를 현대엔지니어링과 합쳤다. 롯데그룹은 롯데삼강·파스퇴르유업·후레쉬델리카·웰가·롯데햄을 차례로 합병해 지난해 종합식품회사인 롯데푸드를 출범시켰다.
물론 전통적인 군살빼기도 이뤄지고 있다. KT는 근속 15년 이상 직원 8320명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포스코는 6개 본부를 철강생산·철강사업 등 4개로 통폐합하고, 경영 담당 임원을 68명에서 52명으로 23.5% 감축했다. 동부그룹과 현대그룹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3조원 이상의 자산 매각 등을 진행 중이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