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만화의 사실성
입력 2014-05-15 02:25
일본은 ‘만화왕국’이다. 만화왕국은 전후 강대국 일본을 표현하는 키워드 가운데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개념이다. 일본에서 만화는 문화 산업으로서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일상 및 여가 생활, 그리고 지식과 인식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 일본 직장인과 학생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 대부분 만화책이다. 직업으로서 만화가의 인기도 매우 높다.
일본 만화의 높은 경쟁력 요인으로 소재의 다양성과 세부묘사의 사실성이 돋보인다. 기업만화 ‘시마’ 시리즈와 스릴러 ‘몬스터’를 보면 등장인물의 인상과 체형 하나하나가 배역의 성격과 무릎을 칠 정도로 일치한다. 요리사 의사 등 직업의 세계, 등산과 낚시 등 취미생활, 세계화와 일본 경제까지 그야말로 만화로 다뤄지지 않는 소재가 없다. 요리 만화 ‘맛의 달인’에서는 음식의 재료부터 조리법과 문화적 맥락까지도 침이 꼴깍 넘어가게 만드는 정교한 스케치와 함께 소개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과 시간과 공력을 들여 소재와 대상을 취재하기 때문에 독자들을 흡인한다.
‘맛의 달인’은 동서신문사 문화부 기자인 주인공이 일본 전역과 세계 각지의 음식문화를 탐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행본 시리즈로 소개되면서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다. 작가인 가리야 데쓰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후유증이 심각한 수준이며 그 여파로 “일본 음식은 이제 희망이 없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주간지 ‘빅코믹스스피리츠’ 지난달 28일자에 실린 ‘맛의 달인’ 연재분에서 주인공 야마오카가 원전현장을 취재하고 돌아온 후 피로감을 호소하며 코피를 흘리는 장면을 그렸다.
후쿠시마현과 일본 정부는 방사능 피폭과 코피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고 부인하는 등 만화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가리야는 “평생 코피는 단 한 번도 흘린 적이 없는데 지진 재해지역에 들어갔다가 밤마다 코피를 쏟게 됐다”고 말했다.
가리야는 천황제와 일제 만행을 거침없이 비판해 반골로 통한다. 유기농과 환경보호론을 옹호하고, 가끔 반전인식을 드러내는 이 작가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념 만화가’로 통한다. 그는 ‘맛의 달인’ 한국음식 편에서 일본 총리들이 과거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했을 뿐 국가가 사과한 적이 없다는 점을 적시하기도 했다. 이번 ‘코피 파문’은 워낙 사실에 충실하기 때문에 독자들을 믿게 만드는 일본 만화의 힘을 보여준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