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6) 이역만리 미국 땅의 교훈 “돈과 ‘백’ 벗어던져라”

입력 2014-05-14 03:45


캘리포니아주는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자동차를 살 돈이 없었던 나는 귀한 달러를 털어 중고 오토바이를 한 대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어갔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부웅’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를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감안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 같았다. 조국에 두고 온 내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곤 했다.

훗날 나는 연방의원이 돼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초청했던 것이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마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무슨 농담인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날 나는 병원 청소를 하는 사람들한테 유난히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들에게 나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왜일까. 서울에서라면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의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부정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부정을 이용하는 아이러니.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그러한 나를 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돈과 ‘백’을 벗어던지자 오히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