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신뢰
입력 2014-05-13 02:28
영성 작가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에 신뢰는 물량이 달린다”고 말했다. 적절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 땅에는 맞지 않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신뢰는 물량이 달리는 정도가 아니다. 완전 실종됐다. 누구도 신뢰라는 말을 차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한국 땅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신뢰다.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신뢰가 부재했는지를 여실히 알게 됐다. 학생들은 이제 어른들을 신뢰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우리를 신뢰해 달라”고 말할 염치도 없다. 무능한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신뢰’를 입에 달지만 정작 신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대통령 또한 신뢰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비단 정치·사회·경제 분야뿐 아니라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사회는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이제 경험적으로 목회자를 신뢰할 수 없게 됐다. 무서운 말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말이 난무하는데도 적잖은 교계 지도자들은 ‘종교 놀음’에 빠져 있다. 신뢰는 무관심을 넘어 무시를 낳는다. 사람들은 종교 놀음을 하는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속으로 무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니 교회에서 소위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하루아침에 신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뢰가 실종되는 프로세스 속에서 ‘신뢰’란 단어가 사라져간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신뢰라는 단어를 되찾아야 한다.
지난해 작고한 작가 브레넌 매닝은 신뢰(Trust)에 ‘가차 없다’는 말을 붙인다. 그래서 ‘가차 없는 신뢰(Ruthless Trust)’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유일한 자세를 가차 없는 신뢰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결정적 동작을 ‘제2의 회심(Second Conversion)’이라고 불렀다. 리처드 포스터는 “회심이란 무언가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무언가를 향해 돌아서는 것을 둘 다 포함한다”고 풀이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제2의 회심이다. 회심이 꼭 종교적 용어만은 아니다. 신뢰의 길을 가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해 이 땅의 모든 공직자들과 지도자들, 목회자들은 회심해야 한다. 그동안의 관행과 굳어져버린 타성, 우리의 이기심, 자기 유익을 위한 욕망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진리와 진심, 인륜성과 이타성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가장 당부한 말이 바로 신뢰였다. 그분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 나온 대로 강하게 말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대통령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믿으세요. 그리고 또 저를 믿으십시오.” 목회자도, 교사도, 정치인도, CEO도, 모든 사람들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믿으십시오.” 우린, 정말로 가차 없는 신뢰를 보낼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참으로 비극적이지만 통절하게 신뢰의 문제를 제기시켰다는 점에서 너무나 교훈적이다. 이번 참사로 우리가 힘들게 유지해 왔던, 견고하게 보였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스스로의 허상을 여실 없이 직시하게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이 ‘다시 검토’의 시작은 신뢰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신뢰의 길’이다. 철저한 회심만이 그 길을 갈 수 있게 한다.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