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의구]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입력 2014-05-13 02:26
월초 연휴를 맞아 찾아간 경북 예천의 외가는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10리길을 걸으면 나타나던 아늑한 마을은 사라지고 온통 불도저가 밀어놓은 황토뿐이었다. 친인척들이 모여 살던 20여채 기와집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름에 장수잠자리를 잡고 겨울엔 얼음을 지치던 마을 앞 저수지 두 곳도 메워졌다. 땅을 돋워 높게 지은 안방과 사랑방, 가을이면 탈곡기를 밟아 나락을 털던 너른 마당, 겨울밤 바람에 짐승울음 같은 소리를 내던 수숫대 담장도 없어졌다. 한여름에도 등목을 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물이 찼던 우물 겸 빨래터의 자취도 사라졌다.
또래인 외삼촌과 소를 몰고 올랐던 뒷산은 중턱까지 흙이 덮인 채 풀이 무성했다. 30여년 전 그곳에 모신 외조부 산소를 찾아올라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북도청 새 청사 부지에 마을 일부가 편입됐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을 모시고 나선 여행길은 추억을 통한 힐링이 아니라 서글픔의 여정이 되고 말았다. 황토에 덮인 선산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훔치셨다.
어르신 사라지고 불신 깊어져
사라진 옛 공간은 오래전 사별한 어르신들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켰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집안이 기울자 4남3녀를 키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셨다. 벼뿐 아니라 보리와 고구마, 조 농사도 지으셨고 말년에는 특용작물인 담배를 재배했다. 젊은이들이 대처로 떠난 뒤에도 논밭을 지키며 육신을 소진하다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외조모는 가족에 헌신적이며 인자한 분이셨다.
외할아버지는 사리가 분명하고 엄했다. 외할머니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를 꺼내면 여지없이 ‘맨제기(멍청이를 뜻하는 사투리) 같은 소리’라고 면박을 주셨다. 이웃에 폐를 끼치거나 나쁜 일을 하면 큰 꾸지람이 돌아왔다. 일이 적은 겨울밤에는 호롱불을 켜놓고 자주 책을 잡으셨다. 곡조를 붙여 읽으시던 박종화의 대하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외조부는 경제개발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농촌을 지키느라 가난 속에 돌아가셨지만, 평생 자연 속에 살며 체화한 정직함이나 사람의 도리·염치를 중시하는 원칙주의는 어린 외손자에게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줬다.
외가마을과 달리 아직도 20∼30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외조부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은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당시 장년들이 그 세대를 대체했지만 그분들이 공유하며 사회를 지탱하던 기본 윤리의식은 퇴색했다.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고 숭례문에 불을 지른 60대, 욕정 때문에 4명을 살해한 70대 어부 같은 어르신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사례들이 잇따르고 있다. 급기야 고교생 수백명을 태워놓고는 저 살자고 배를 버린 선장까지 등장했다.
책임 지는 어른 될 용의 있는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매우 많고 복합적이다. 직업적 소양이나 책임감이 전혀 없는 선원, 과적을 밥 먹듯 하는 비뚤어진 기업윤리와 이를 용인해온 연안물류 체제, 바닥을 드러낸 정부의 재난대처능력 등. 그 이면에 사람과 의식·도덕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면 지나치게 관념주의적인 접근일까? 하지만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은 결코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어르신을 잃고 표류할지 모른다. 우리들은 세월호 선장과 달리 책임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지, 적어도 될 용의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김의구 편집국 부국장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