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5) “이승만 물러나라” 4·19 직후 드디어 미국으로
입력 2014-05-13 02:23
‘빨리 떠나야 한다.’ 군대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미국으로 떠날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또 아버지의 힘을 빌렸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속성제대를 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내가 ‘나이롱 환자’라는 걸 알고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무 제대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미군 고문관들의 병원 감사 때문에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생각지도 못한 고생을 했다. 36개월을 복무해야 하는 군대에서 10개월 만에 의가사제대를 했다. 하지만 치질 수술한 부위가 계속 말썽을 일으켜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 부위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제대를 하자마자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 너머로 사람들의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고, 나도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선거에까지 번졌다. 정권연장에 눈 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의거였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한 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직원은 양복 한 벌을 당당히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로스앤젤레스 근처 업랜드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영어를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할 때였다. 세계 최빈국에서 온 불쌍한 유학생에게 미국사회는 혹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파던(뭐라고요)?”이라고 반복하자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못 알아듣고 남들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 나아야 했다. 미국 교회를 가려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때였다.
도대체 왜 여길 왔나.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