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스와질란드 김종양 선교사] 아쉬운 이별 ‘사역 동역자’ 결혼하고 돈 벌어 ‘사역 지원자’로
입력 2014-05-12 02:18
1993년 동역자 필리 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포트엘리자베스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부흥회에는 백인과 흑인, 혼혈인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5일 동안의 집회가 끝난 후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가 끝나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와서 간증을 했다.
“저는 몇 년 동안 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김 선교사의 기도를 받고 암을 깨끗이 치료받았습니다.” 암을 치료받은 그 여인은 그 후 여러 번 스와질란드 선교센터로 찾아와 봉사를 했고, 그녀의 남편도 임마누엘 신학교를 건축할 때 몇 개월간 봉사를 했다.
아프리카에서 집회를 하면 많은 환자들을 접한다. 설교가 끝나면 환자들을 위한 기도시간을 갖는데, 때로는 기도시간이 설교시간보다 더 길어질 때가 많다. 어떤 때는 기도를 받은 환자들이 대부분 치료를 받았다며 간증을 한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한 사람도 간증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간증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무척 실망하기도 하고, 혹시 내가 무얼 잘못한 건 아닐까 염려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자만하지 않도록, 원하시는 때에 치료의 기적을 나타내신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포트엘리자베스 집회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가려 하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저는 아이반이라고 합니다. 선교사님을 따라 스와질란드로 함께 가서 사역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스와질란드로 따라오겠다고 하니 너무나 난처했다. 스와질란드에 있는 아내의 동의를 얻은 후 결국 아이반을 스와질란드로 데려왔다.
스와질란드선교센터에 도착하자 아이반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남아공에서 태어났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만난 독일 여자와 결혼하고,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자 어느 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독일로 떠난 뒤 연락을 끊었습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아이반은 우리의 동역자로서 선교센터에서 함께 살게 됐다.
효과적인 선교를 하려면 신학적인 선교지식이나 조직보다 현지인 동역자를 잘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아이반 형제를 보내주셨다. 우리는 가끔 밤을 새워가며 선교 이야기를 했다. 아이반 형제는 성실하고, 신실했다. 먼 지역으로 선교를 나갈 때는 운전사가 되어 주었고, 선교센터에 축대를 쌓을 때에는 현지인들을 고용해 필요한 벽돌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선교에 봉사하며 그는 부인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받았다.
약 1년이 지난 후 그가 나에게 “1년 동안의 선교 사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 마음이 안정됐으니 사업을 시작하고 결혼도 해서 물질적으로 선교사님을 돕겠다”며 스와질란드를 떠나겠다고 했다. 그는 떠나기 전 마활랄라의 한 가정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던 3명의 스와지 청년을 소개해 줬다. 아이반이 떠난 후 나는 그 3명의 청년을 데리고 기도모임과 성경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들과 함께 현재의 이시드라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아이반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중국인 여성과 재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나에 대한 고마움의 의미로 아들 이름을 김이라 지었다. 아이반은 지금도 꾸준히 스와질란드 선교센터에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스와질란드를 방문하는 등 선교 사역에 도움을 주고 있다.
선교 사역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담대함을 달라고 구할 때가 참 많다. 13년 전쯤 남아공의 주교가 “매년 연말 넬스프루이트(Nelspruit)의 공설운동장에서 집회가 열리는데, 금년 집회에 설교를 해 달라”며 초청을 했다. 수만명이 모이고, 교회 지도자들과 정치인들도 참석하는 대형 집회였다. 설교를 잘 못하면 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에게 전화를 걸어 “초청은 감사하지만 그 집회에는 저보다 한국의 명성 있는 설교자를 모셔오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주교는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뒤로 약 5주 동안 설교자를 섭외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연말연시에는 교회 사정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거절했다. 집회를 1주일 정도 남겨 놓고 주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찾지 못했다고 하자 그는 “우리는 당신을 초청하는 것이지 다른 한국인 목회자들이나 유명한 설교자를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세우시기에 초청하는 것”이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거절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밤을 새워 기도하며 설교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 저는 설교를 잘 못하는데, 저들이 실수로 저를 초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라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매일 부족함을 고백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안함과 자신감을 주셨다. 설교 제목을 정하고 집회 하루 전까지 마지막 부분을 정리했다.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넬스프루이트로 갔다. 공설운동장 가까이 오니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고, 나를 태운 차를 일부 경찰차들이 와서 호위를 했다. 집회본부가 있는 텐트에 도착하니 주교가 강단으로 인도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 오늘 밤 저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셔서 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여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큰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수만 명이 모인 자리라 장내는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설교를 시작할 수가 없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 후 나는 큰 소리로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잠시 기다리니 모인 무리가 “아멘”하고 응답을 한 후 조용해졌다. 처음으로 수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하는 설교였지만 성령님의 도우심과 기름 부으심 덕분에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힘 있고 자신 있게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설교가 끝나자 강단 위에 앉아 있던 남아공의 목회자 몇 분이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정말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며 설교 원고를 복사해 달라고 했다.
1주일쯤 지난 어느 날 남아공의 임마누엘국제신학교 출신인 프리실라 전도사가 전화를 해 “선교사님께서 공설운동장에서 하셨던 설교가 지금 라디오 방송에 나오고 있습니다”라며 채널 번호를 알려줬다. 그때 자동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고, 차에는 라디오가 없어 듣지 못했지만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탁월한 설교자가 아님에도 하나님은 나를 들어 쓰셨다. 나에게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설교하라’며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공설운동장 집회에서 설교한 이후 많은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구원 사역을 위해 무명의 설교자에게도 필요에 따라 기름을 부어주시어 능력 있는 설교를 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와질란드 김종양 선교사
◇김종양 선교사 △1946년 전북 출생 △1985년 독일 베뢰아 신학교와 영국 웨일스 신학대학 졸업 △1985년 10월 병원선교회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세계선교회에서 파송받아 말라위 사역 시작 △1986년에 아프리카대륙선교회를 설립해 말라위 스와질란드 등 중남부 아프리카 7개국에 교회 고아원 병원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신학교 선교농장 기도원 기독의과대학 설립 △1987년 미국 남침례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 받고 1988년 6월 선교지를 스와질란드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