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4) 젊은 날의 방황 끝에 “청교도 나라 미국으로 가자!”
입력 2014-05-12 02:58
어차피 공부할 마음도 없는 학교에 비싼 학비 낼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연극에 몰입했던 것처럼 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내 손짓에 따라 여자의 몸이 몇 번 뱅그르르 돌아가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창준이 이놈, 너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재수를 하든지 편입을 하든지 할 일이지 허구한 날 모양만 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바지 주름을 잡으며 대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아버지의 호통이 터져 나왔지만 못들은 척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클럽에서 나는 손꼽히는 춤꾼이 됐다. 그런데 리듬이 몸에 익어 어떤 음악이 나와도 내 맘대로 춤을 출 수 있게 되자 이전만큼 신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겉으로는 명동의 최고 멋쟁이가 되어 돌아다녔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전에서 함께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광화문에 있는 종교교회를 선택했다. 당시 ‘나 하나의 사랑’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킨 가수 송민도의 남동생 송민영이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교회를 나가면서 나만의 기도시간을 가졌다. ‘주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신다’는 믿음에 고독감이 사라지고 밤잠도 잘 오기 시작했다. 이제 나를 다시 찾은 듯했다. 하지만 방황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뒷돈을 써서 다른 학교에 넣어주셨다. 이른바 ‘보결’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마저도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정 그러면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라도 하면 어떻겠느냐”는 어머니 요청에 절에 들어갔다가 기겁을 하고 하루 만에 돌아왔다.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집을 나선 나는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등짐을 가득 진 지게꾼들 틈으로 투전판을 벌이는 야바위꾼들,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미군부대에서 빼낸 레이션 박스의 먹다 버린 햄을 넣어 끓이는 부대찌개 냄새에 비위가 거슬렸다. 이게 뭔가. 모두가 배고픈 시대에 홀로 배부른 나는 희망이 있는가. “아 싫다. 떠나야지. 지긋지긋한 가난과 부패의 땅을 떠나버릴 것이다.” 나는 혼자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갈 곳은 미국뿐이었다. 방법은 유학. 법 공부보다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기로 하고 공대 쪽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원자를 찾기 위해 미국의 로터리 클럽에 편지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그레이버씨에게서 답장이 오고, 그가 사는 동네의 채피 대학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 변두리에 있는 대학이었다.
그런데 군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비자받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하루 빨리 군대에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나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기신 듯 여기저기 다니시며 육군 입대 영장을 받아오셨다. 당초 입대 예정일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하게 됐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를 훈련시키는 제2훈련소로 보내졌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도 춤바람이 한창이었다. 장교들은 쉬는 날이면 지르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다음날부터 장교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의무대로 발령이 났다.
어느 날 고참이 나를 찾았다. 링거 2병을 주며 대전시내의 어떤 약국에 갖다 주라고 했다. 약사는 링거 병을 받자마자 봉투를 내밀었다. 빳빳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수많은 약과 주사가 그렇게 빼돌려지고 있었다. 사회나 군대나 곳곳에 부정이 만연했다. 환멸을 느꼈다. 떠나자. 저 큰 나라인 미국으로 가자. 미국은 기독교인들이 세운 나라가 아닌가. 아무래도 이처럼 썩어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미국 유학 준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