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안전 대한민국⑤] 벨소리 요란했지만…느긋한 발걸음…서울대 기숙사 화재 대피훈련
입력 2014-05-10 02:35 수정 2014-05-10 18:47
올 초부터 미국 뉴욕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유학 중인 이모(23·여)씨는 최근 기숙사에 비상 사이렌이 울려 화들짝 놀랐다. 허둥대는 이씨와 달리 미국 친구들은 차근차근 지정된 장소로 대피했다. 화재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한 훈련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9일 “실제 상황이 아니라 훈련이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한 건 한국인 친구들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현실적인 재난 대비 훈련이 정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재난이 닥치더라도 위기대응법이 몸에 배어 있어야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화재가 발생했으니 비상 대피하기 바랍니다.”
9일 오후 2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 기숙사 919동 앞.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시작됐다. 화재 상황을 가정한 비상 대피 훈련이다. 기숙사 직원, 조교 등 진행요원 50여명과 소방차까지 한 대 동원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부가 전국 교육청과 대학을 대상으로 기숙사 건물 안전점검 및 화재 대피 훈련을 실시하라고 주문한 데 따른 것이다.
훈련이 시작되자 학생들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은 느긋했다. 훈련이 있는지 몰랐다는 듯 남학생 둘이 기숙사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하기도 했다. 진행요원들은 건물 안으로 진입해 방문을 하나씩 두드리며 학생들을 불러내 계단으로 대피시켰다. 진행요원이 “빨리 대피하세요”라고 외치며 재촉하면 학생들은 발걸음을 서두르는 듯했다. 그러나 진행요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내 원래대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오늘 금요일인데 뭐 할까” “중간고사 공부 많이 했어?” 같은 잡담을 나누며 느긋하게 대피하는 학생도 눈에 띄었다.
훈련이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지만 훈련 대상 인원 972명 중 미리 마련된 대피소에 모인 사람은 30여명에 불과했다.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상당수 학생이 인근 잔디밭이나 매점 등 다른 장소로 이동한 데다 대피소에는 훈련 대상이 아닌 학생들까지 섞여 있어 대피 인원을 정확히 집계하기란 불가능했다. 한 진행요원은 “대상 인원 전체가 훈련에 참여한 건 아니다. 수업을 들으러 갔거나 주말이라 학교를 떠난 학생도 많다”고 말했다. 이날 훈련이 있는 줄 모르고 기숙사를 찾았던 신모(19)군은 “훈련한다는 안내문을 보긴 했지만 자세히 읽지 않았다”며 “다른 곳에 있다가 와서 대피소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대피 훈련이 끝나자 진행요원들은 학생들을 기숙사 앞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학생들은 119대원의 지시에 따라 소화기와 소화전 조작법을 배웠다. 나무와 휘발유를 채운 드럼에 불을 붙인 뒤 소화기로 불을 끄는 훈련이었다. 불을 붙이는 과정에서 한 진행요원의 옷에 불이 붙어 잠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다수 학생이 소화기를 처음 사용해보는 듯 여러 차례 시도 끝에 간신히 분말을 뿜어냈다. 반면 외국인 유학생 두 사람은 능숙한 솜씨로 소화기를 조작해 눈길을 끌었다. 훈련은 당초 예정보다 40분 일찍 오후 3시20분쯤 끝났다. 훈련을 마치며 진행요원과 학생 등 70여명이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이들 중 학생은 30여명에 불과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