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화가’ 전성시대] 그림은 또 다른 존재이유… 조명이 꺼지면 붓을 잡는다
입력 2014-05-10 02:22
배우 하정우는 2011년 독일에서 영화 ‘베를린’을 촬영하던 중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북한 공작원 역을 맡은 그는 낯선 타국에서의 고독한 마음을 코발트블루의 그림에 담아냈다. 이 작품으로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전시를 열어 인기를 모았다. 이후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낸 그는 이곳에서도 붓을 잡았다. 원주민과 자연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화폭에 옮겼다.
하정우는 베를린과 하와이에서 그린 작품을 모아 지난 3월 서울의 메이저 화랑인 표갤러리에서 ‘트레이스(Trace·추적)’라는 타이틀로 7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배우라는 직업을 초상화처럼 표현한 ‘피에로’ 등 기존 작품에 비해 더욱 디테일해지고 다양해졌다. 2003년부터 시작한 그림이 10년 만에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얻었다. ‘배우화가’에서 ‘정식화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의 아버지인 배우 김용건은 소문난 컬렉터다. 오치균 작가의 작품을 특히 좋아해 집안에 늘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하정우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흥미를 갖고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몇 년 전 그의 그림을 본 김흥수 화백은 “정규 교육을 받은 작가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과 표현력으로 훌륭한 화가가 될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크린을 통해 미처 하지 못한 얘기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림은 취미가 아니라 내가 버틸 수 있는 수단이다. 연기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연기에 정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2011년 출간한 에세이 ‘하정우, 느낌 있다’ 중에서)
연예인 화가 전성시대다. ‘파인 아트(Fine Art)’의 세계에 빠져드는 스타들이 늘고 있다. 회화 조각 사진 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과 감성을 갖춰 나름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연예인의 원조는 가수 조영남이다. ‘화투 작가’로 잘 알려진 그는 1973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40여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그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고교시절 미술반장을 지낸 것이 전부다. 하지만 스스로 ‘화수(畵手·화가 겸 가수)’라고 부르며 국내외 전시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노래 부르기와 그림 그리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그림”이라며 “붓을 잡고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값은 호당(1호는 우편엽서 크기) 30만원 정도다.
지난해 한 인터넷 매체가 꼽은 ‘연예인 화가 1위’에 오른 구혜선의 직업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우는 물론이고 가수, 작곡가, 영화감독, 소설가에 화가까지 보태 팔방미인이다. 그는 2009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 전시와 각종 아트페어(미술품 마켓)에 참가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디자인적인 그의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몽환적인 것이 특징이다.
배우 심은하 김혜수 조재현 윤은혜도 그림을 그린다. 심은하와 조재현은 유명 화가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가수 최백호, 소녀시대의 태연, 걸스데이의 유라, 레인보우의 재경, 브라운아이드소울의 나얼,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 에이핑크의 손나은과 개그맨 임혁필 역시 그림솜씨를 자랑한다. 배우 지진희 김영호 박상원 조민기는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김혜수는 2009년 서울오픈아트페어(SOAF)에서 한 작품을 500만원에 팔았다. 수묵화를 그리는 심은하의 작품은 2009년 비공개 경매에서 낙찰 하한선이 500만원에 형성되기도 했다. 하정우의 그림 가격은 호당 15만∼20만원. 최근 전시에서 작품을 최고 1800만원에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들은 유명세 덕분에 일반 화가보다 높은 가격에 그림이 팔린다.
11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4 SOAF’에는 배우 강석우 김영호 김혜진이 스타자선전에 참가했다. 강석우는 새 두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는 그림 ‘무제’를, 김영호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을 촬영한 사진 ‘희망’을, 김혜진은 노란색 바탕에 한 소녀의 뒷모습을 그린 ‘봄이 가고’를 내놓았다. 그림값은 각각 200만∼500만원으로 수익금은 문화 나눔을 위해 기부한다.
연예인 화가들은 대부분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타고난 소질을 살려 혼자 그린다.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발산한다고나 할까. 이들이 밝히는 그림 그리는 이유는 비슷하다. “스포트라이트 이면에 밀려드는 외로움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나를 바라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림은 나의 또 다른 존재이유다.”
연예인 화가들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미술은 어렵다”고 여기는 관람객들에게 연예인 화가 전시는 대중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예술의 경계를 낮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반면 연예인이 그림에 소질이 조금 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화가로 데뷔하고, 스타성에 의존해 상업적인 가치를 따져 전시를 여는 화랑계 풍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한 중견 화가는 “현대미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만큼 연예인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비판할 것은 못 된다”며 “하지만 유명세를 빌미로 작품을 팔고, 작업을 쉽게 생각한다면 문제”라고 말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도 “연예인들이 작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너도나도 전시를 열어 좋은 성과를 얻는다면 평생 작업에만 매달리는 화가로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