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손영옥] 그 남자의 효도휴가
입력 2014-05-10 02:41
그 책을 권한 건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서였다. 두 남자, 경상도 두 남자. 이 둘은 아주 친했다. 내가 빌려준 책을 서로 돌려 읽었다. 한 사람은 대놓고 가부장적이었다. 또 한 사람은 페미니스트로 보였는데, 속은 둘 다 마찬가지라고 누군가는 평했다.
책의 반향이 그리 클 줄은 몰랐다. 둘 다 책장을 넘기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했다. 오십을 훌쩍 넘은 두 남자를 울린 책은 ‘똥꽃’(그물코)이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농부 전희식씨가 썼다.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 검노란 똥자국들’(‘똥꽃’ 일부)
시에서 짐작하겠지만, 책은 그가 치매 노모의 치료를 위해 공기 좋은 산 속에 집을 구하고 거기서 함께 살며 쓴 치유의 기록이다. 노모를 모시며 그가 행한 실천은 놀랍다. 나무 블록 장난감을 만들고, ‘노인용 동화책’을 만들었다. 기저귀는 절대 차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어긴 적이 없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경력 단절’의 결단이다.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가장이다. 농부로 살더라도 이어가야 할 생계가 있다. 하지만 그는 큰형님 댁 서울 아파트에서 세상과 ‘격리’되어 사는 어머니께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삶을 돌려주고 싶었다. 아내와 자식의 동의를 얻어 인생의 황금기 3년을 노모를 위해 바치기로 했다.
한국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가족을 챙기는 건 사치다. 부모도 그런 가족 중의 하나다. 그러다보니 효는 전업주부인 며느리의 몫으로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돌리는 남성들의 태도에 대해 반박하고 싶었다. 효야말로 그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어난 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서재에 먼지가 쌓인 채 꽂혀 있는 ‘똥꽃’을 꺼내 권한 건 나름의 항변이었다.
대놓고 가부장적인 남자는 아흔을 넘긴 노모가 세상을 떠난 지 이태 정도 됐다. 속으로 더 크게 울었을 것이다. 속이 가부장적이라는 또 다른 남자는 경남의 시골 마을에 팔순 넘은 노모 혼자 사신다.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그 책, 어땠나요?” “울면서 읽었다. 정년퇴직하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어이쿠, 그때까지 어머님께서 살아계실까요?” 잠시 말을 멈추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누님도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
1년여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사이 그는 회사에서 다소 여유가 있는 부서로 옮겼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 두 달에 한번씩 하루, 이틀 휴가 내 고향 어머님께 간다.”
그렇게 주말을 낀 3박4일의 효도휴가는 1년째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노모와 보내는 그 시간, 그가 하는 일이라곤 노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노인용 전동차를 탄 노모와 마을 근처 들녘을 한 바퀴 산책하는 걸 빼곤 내내 집안에서 지낸다. 일제 강점기 당신의 소녀 시절, 고된 시집살이, 피난 가서 첫 아이를 잃은 슬픔, 자식들이 상장을 받았을 때의 기쁨…. 누구네 아들이 승진한 얘기, 누구네 딸이 이혼한 얘기까지 이야기는 시시콜콜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래서요.” “그 담엔 우찌 됐어요.” 추임새를 넣어주는 아들 때문에 더욱 신이 난 노모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십줄의 남자가 시골 집 마루에 누워 팔순이 넘은 노모와 이야기꽃을 피우는 광경, 생각만 해도 느껍다. 서울에선 손 하나 까딱 않는 그다. 하지만 노모를 도와 파전을 부치고 찌개를 끓이고 설거지를 한다. 혼자 계실 때는 종일 틀어놓는 TV를 노모는 아들이 오면 아예 꺼둔다.
나는 그 남자의 효도휴가를 ‘21세기 신효도 문화’라 부르고 싶다. 혹자는 말한다. 휴가 내 노모와 지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몰라서 하는 얘기다. 조직의 간부가 두 달에 한번 꼬박꼬박 휴가를 내 오롯이 노모와 시간을 보내는 건 효도 실천에 대한 굳은 의지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효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농경사회에서나 가능한 문화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육아는 사회화되고 있지만, 부모만이 할 수 있는 몫이 있기에 노르웨이처럼 사회보장이 잘 된 나라에서도 3년의 육아휴직을 법으로 보장한다. 국내에서도 육아휴직이 서서히 정착되어가고 있다. 노인 문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양병원 간병인의 전문적 손길이 아닌 피붙이 자식만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있다. 안방에서 임종을 맞는 꿈. 그건 폐기처분될 구습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 재활이 가능한 현실의 문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효도휴직 제도 같은 것 말이다.
어버이날이 막 지났다. 대부분 나처럼 전화 한 통화와 현금이든 선물이든 보내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정년퇴직하면 시골로 내려가 2년 정도 노모를 모시고 살고 싶어. 그런데, 점점 기력이 떨어지시니….” 노모의 86세 나이가 안타까운 그의 물기 묻은 목소리를 들으며 효도휴직 제도를 꿈꿔본다.
손영옥 문화생활부장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