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안전 대한민국④] 관피아는 관료·업계·정치권 합작품… 50년 넘은 적폐

입력 2014-05-09 03:58


④ 부정부패·대형사고 뒤엔 ‘官피아’

2006년 12월 8일 대외무역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전략물자관리원’의 설립이었다. 전쟁·테러용 무기에 이용될 수 있는 물품과 기술의 수출을 통제하기 위한 공공기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6월 전략물자관리원이 공식 출범했다.

◇관피아의 지독한 재생산 구조=출범 뒤 7년간 산업부 공무원 출신이 차례로 이 기관의 수장을 맡았다. 초대 원장 A씨는 산업부의 전신인 산업자원부의 에너지안전팀장이었다. 2대 원장인 B씨는 산자부 근무 시절 전략물자관리원 설립을 주도했다. 법 개정 당시 전략물자관리과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취업할 자리를 재직 시 만들어 ‘셀프 재취업’을 한 셈이다.

두 전직 원장 모두 3년 임기를 채웠으며 공무원 때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다. 8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전략물자관리원장은 기본 연봉이 1억원이고 성과상여금 등을 합쳐 해마다 약 1억3000만원을 받는다. 김인관 현 원장도 산업부 출신이다.

법에는 전략물자관리원장이 산업부 출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원장 선임도 형식적으로는 공모를 거친다. 그럼에도 산업부 출신이 3차례 연속 선임된 배경에는 이른바 관피아(관료+마피아)끼리 밀고 끌어주는 ‘재생산 구조’가 있다.

2010년 2대 원장 선임을 앞두고 전략물자관리원에 원장후보추천위원회가 구성됐다. 추천위원은 5명으로 내부 이사 3명과 외부인사 2명이었다. 외부인사의 직함은 각각 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과 공작기계산업협회 부회장이었으나 둘 다 ‘관피아’였다. 내부 이사 3명(지식경제부 무역정책관, 기계산업진흥회 부회장, 정밀화학산업진흥회 부회장) 역시 관료이거나 관료 출신이었다. 5명이 모두 관피아였다. 결국 원장 후보로 추천된 2명 중 민간기업 이사는 탈락하고 관피아 출신 B씨가 최종 선임됐다. 지난해 원장 선임 때도 후보추천위 5명 중 3명이 관피아였다.

◇정치권과 업계도 관피아 양산에 책임=정교한 관피아 재생산 구조보다 더 본질적인 건 ‘인식’이다. 공무원들은 전략물자관리원장과 같은 자리를 ‘당연히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국민일보가 국회 김태원·김한표·박민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지난해 국토교통부 산업부 해양수산부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 현황을 보면 차관·실장급은 유력한 공공기관의 사장으로, 국장 이하는 산하기관 이사·감사나 산하 연구원의 원장·부원장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부분 협회의 상근 부회장은 공무원의 몫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이런 인식은 1963년 행정고시제도 도입 이후 50년 이상 진행된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관(官) 주도’라는 점에 핵심적인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관료가 권력을 움켜쥐고 있으므로 업계는 관과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공무원을 ‘모신다’는 것이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산업부와 관련된 협회는 너무 많아 장관도 다 알지 못할 것”이라며 “어떻게든 협회나 조합을 만들어 사무관 한 사람이라도 확보하려고 하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생리”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잘못도 크다. 전략물자관리원의 경우 예산을 잡아먹는 공공기관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인데도 법 개정 당시 국회에서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산하기관이 많을수록 좋다’는 국회의원들의 비뚤어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의원들은 후원금을 모을 때 유리하고 지역의 일자리 민원 등을 해결하기 쉽다는 이유로 산하 기관·협회가 많은 상임위를 선호한다. 각종 법안 처리에서 협회 설립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도 국회다.

무엇보다 대선 뒤 논공행상하듯 정치권 인사가 공공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가는 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관피아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교수는 “관피아는 관료와 업계, 정치권의 공동작품”이라며 “정치권부터 낙하산 인사를 근절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협회에 대한 감시 강화해야=관피아를 하루아침에 뿌리 뽑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과 협회의 자율성 및 투명성을 높여 관의 영향력을 점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문제를 풀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안전과 규제 관련 기능을 담당하는 산하기관·협회의 자율성 확보는 시급하다. 예컨대 한국전기안전공사나 한국가스안전공사의 경우 주 업무가 안전에 관한 것이지만 산업을 진흥시키는 일을 하는 산업부의 영향력 하에 있다. 정지범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규제와 진흥은 서로 견제해야 하는데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게 문제”라면서 “규제는 독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과 협회에 대한 감시망을 더욱 촘촘히 해 관피아를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공기관과 협회의 업무가 더욱 투명하게 공개돼 시민의 감시 활동이 활성화되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책임감이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도 “관피아의 근본 원인은 정부와 산하기관·협회 간 업무가 폐쇄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어느 협회에 무슨 지원을 하는지 등을 투명하게 오픈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경력 관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문 교수는 “고시 동기가 차관이 되면 50대 중반에 퇴직하는 관례도 문제”라면서 “공복으로 끝까지 남을 수 있게 경력을 관리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