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면책 후 탕감됐는데 “빚 갚아라” 날아온 독촉장
입력 2014-05-09 03:02
국민행복기금 1년 명암
부산에서 일용직으로 에어컨 설치를 도우며 살아가는 박모(45)씨는 지난 3월 17일 ‘채권자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 명의의 지급명령을 받아들고 아연실색했다. 지난해 7월 분명히 법원에서 파산면책 선고를 받고 탕감된 빚인데, 이 빚이 되살아났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바로 지급명령을 보내온 신용정보회사를 통해 이의를 신청했다. 신용정보회사 직원은 “면책을 받은 건 알고 있지만 지급명령을 보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말로 응대했다. 면책결정문을 확인한 국민행복기금이 지급명령을 취하하며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지 못한 데서 터졌다. 베트남에서 온 부인이 지급명령 통지서를 내보이며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생선 노점을 하는 박씨의 부모, 이제 5살 3살이 된 두 아이가 크게 놀랐다. 박씨의 부인은 베트남 다문화가정 모임에 지급명령을 내보였고, 동료들은 “박씨에게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사기결혼 사례라고 호들갑을 떠는 이도 있었다. 박씨는 “지금은 빚이 없고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부인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출범 만 1년을 넘긴 국민행복기금을 두고 정부는 대통령의 공약을 성공적으로 이행 중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3월 말까지 1년여 기간 동안 29만4000명의 신청을 접수, 이 중 24만9000명에 대해 채무조정을 지원했다. 국민행복기금 출범 당시 5년간 32만6000명에게 혜택을 주기로 목표한 점을 감안하면 시행 1년차에 벌써 76%를 넘는 실적이 쌓인 셈이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2월 국민행복기금을 현장 행정우수사례로 선정해 대통령에 보고했다.
제도를 기획한 정부뿐 아니라 다수의 수혜자들도 국가가 부여해준 재기의 기회에 감사하고 있다. 부모님의 병원비로 카드빚과 대출사기에 고통 받던 한 여성은 국민행복기금의 도움을 받은 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수기를 써 보내기도 했다. 숨어 지내는 삶을 그만두게 해준 국민행복기금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다. “별 볼 일 없는 제게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고 믿고 감사하고 성실히 살 생각” “분명히 도덕적 해이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700명을 넘었다.
하지만 워낙 광범위하고 파격적인 정책이다 보니 박씨의 사례처럼 이행 과정에서 다소 삐걱거리는 과정이 있다. 법원에서 파산·면책이 확정, 이미 갚을 의무가 사라진 채권에 대해서도 국민행복기금의 지급명령을 받는 사례가 속속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면책이 결정됐지만 지난달 4일 원금 1500만원에 연체이자 1600만원 등 총 3100만원을 갚으라는 지급명령을 받은 이도 있다. 2012년 개인회생을 신청해 매달 300만원씩 갚아나가던 중 채무자도 모르게 농협 채권 1300만원어치가 국민행복기금으로 팔린 사례도 발견됐다. 이 채무자는 “국민행복기금에서 추심을 양도받았다”고 주장하는 신용정보회사로부터 독촉장을 받았다.
이를 두고 일부 면책자들은 “제때 이의신청을 하면 다행히 구제를 받을 수 있지만, 법적인 절차에 밝지 못한 이들은 채무를 다시 갚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금융위원회와 새정치민주연합 이학영 의원실 등에 따르면 이렇게 파산·면책자인데도 불구하고 지급명령이 재차 신청되는 등의 이유로 채권 환매가 결정된 채무자는 8500명, 채권 원금은 672억원가량이다.
시민단체 민생연대와 금융정의연대는 8일 서울 중구 태평로 금융위 앞에서 집회를 열고 “면책자에 대한 독촉행위를 중단하라”고 강하게 촉구했다.
면책자 지급명령 소동은 대규모 채무조정 과정에서 파산·면책 여부를 가려내지 못한 해프닝이다. 사실 지급명령 확정 여부와 관계없이 파산·면책 결정이 우선적인 효력이 있고, 이에 따라 채무자가 피해를 입는 경우는 없다. 금융회사가 채권을 넘긴 뒤에 법원에서 면책 결정을 받아 시점이 엉킨 사례들도 있다. 절차상 오류에 따른 환매 규모도 수혜 규모에 비교하면 크지 않은 편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난해 여름에 체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을 환매·정리했고, 앞으로는 매달 은행연합회와 시스템을 연동토록 조치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아직도 국민행복기금을 향한 시선에는 행정우수사례의 칭찬과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지난해 말까지 기금상환 연체로 중도 탈락한 이들은 채무조정 약정자(16만8908명·전체 채무조정자 24만여명 가운데 공적 자산관리회사 이관자 제외) 가운데 15.2%(2만5710명)에 이른다. 이를 두고 소득창출력이 너무 낮아 조정된 채무조차 못 갚는 이들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다. 반면 “공짜 점심은 없다”는 도덕적 해이 방지책이 잘 작동되는 방증이라는 시각도 있다. 캠코 관계자는 “비슷한 지적과 해명의 연속”이라며 “재기 취업교육을 병행하고, 불법·과잉 추심이 없도록 개선해 잡음이 없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