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그대에게~” 33년 만에 다시 듣는 저음의 따스한 목소리… 50주년 특별방송 진행
입력 2014-05-09 02:07
“운전하고 오면서 오프닝 멘트 연습도 했어. 근데 생각보다 잘 안 되더라고. 잭슨 브라운의 ‘러닝 온 엠티(Running on empty)’. 나도 이 곡을 오프닝으로 생각했는데. 허허.”
밤 10시를 가리키는 신호음이 울리자 분주했던 라디오 스튜디오엔 저음의 따뜻한 목소리가 흘렀다. 걱정과는 달리, 노련하고 담담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50년째 같은 시그널 음악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을 배경으로 DJ 황인용(74)은 독일 작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마음은 놀랍도록 명랑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네/…/요즘 내 가슴처럼 벅차고 걷잡을 수 없는 건 아마 못 보았을 것이네.’ 이 한 구절이 지금 제 기분과 똑같네요. 떨리고 걱정스럽고…. 여러분, 저 33년 만에 앉았어요. 제 목소리 괜찮죠?”
KBS 해피FM(106.1㎒)에서 매일 밤 10∼12시 방송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이하 ‘밤그대’)가 지난 7일 50주년 특집 방송을 시작했다. 첫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KBS 본관 라디오 스튜디오를 찾은 황인용은 그 시절 청취자들과 감격스런 재회를 했다. 그는 1975년부터 81년까지 ‘밤그대’ 최장수 DJ로 활약했다.
방송 전 만난 황인용은 “방송은 운전하는 것과 비슷해 오랜만에 하려니 두려웠다”며 “쑥스러웠지만 내겐 너무 큰 의미이기 때문에 응했다”고 말했다. 그는 “‘밤그대’는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프로그램”이라며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재능을 확인시켜줬고 가정 경제에도 도움이 많이 됐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DJ를 맡고 있는 가수 임지훈(55)은 “당시 애청자였던 내가 운 좋게도 황 선배와 같은 자리에서 50주년을 맞이하게 됐다”며 “뜻 깊은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이날 함께 방송을 진행하며 지난 50년의 시간을 하나하나 추억했다. 33년 전 소녀였던 청취자는 “고3 아들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고 있다”며 웃었고, 그의 목소리에 잠이 달아났다는 청취자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영광스럽다”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방송 중엔 78년 충남 태안군 연포해수욕장에서 열린 공개방송 분량도 잠깐 전파를 탔다. 그는 이날 청취자들과 함께할 음악들을 직접 골라오는 열의도 보였다.
‘밤그대’가 5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정겨운 이름이 한몫한 것 같다”며 “그동안 여러 DJ를 앉히며 새로운 시도를 아끼지 않았던 것, 대중음악과 팝을 넘나들었던 것을 높이 살만하다”고 평가했다.
황인용은 “엽서 시대엔 아름다운 글씨체, 미술 작품, 사진들도 함께 보내 읽는 재미가 좋았다”며 “청취자가 사는 지역까지 소개하면서 친근한 분위기를 이어갔는데 요즘엔 예컨대 ‘1234번님’, 이렇게 휴대폰 뒷번호를 부르는 게 왠지 차갑게 들리더라”며 아쉬운 마음도 표현했다.
이날 마지막 곡으로 황인용은 미국 텍사스 출신 록밴드 지지탑의 ‘블루 진 블루스(Blue Jean Blues)’를 청했다.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 시절 ‘DJ 오빠’로 변신했던 그. 두 시간 방송 내내 2대 8로 갈라진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었던 그의 갈색 뿔테 안경 뒤, 아련한 눈빛이 촉촉하게 젖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