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슬픔에 중독된 이들 재활 도와드립니다… 한차현 장편소설 ‘슬픔장애재활클리닉’

입력 2014-05-09 02:33


애도와 위로가 우리 사회의 모순과 결핍을 힘겹게 채우고 있는 가운데 소설가 한차현(43)이 치명적인 슬픔에 중독된 슬픔장애환자들의 애처로운 고투와 재활을 그린 장편 ‘슬픔장애재활클리닉’(도서출판 박하)를 내놨다.

책을 펼치면 “떠나는 사람은 슬프지 않다. 남은 사람이 슬플 뿐이다”라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의 한 구절이 나오고 어느 장례식장의 풍경이 소설의 첫 장면을 장식한다. “짙은 남색 치마는 구김 없이 단정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은 검고 윤기 있으며 이마는 반듯한 데다 새하얗다. 신문사에서 보낸 국화 화환처럼 마루 구석에 홀로 상을 받은 여자가 일회용 스티로폼 그릇에 담긴 육개장을 떠먹는다.”(9∼10쪽)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장례서비스업체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이하 애위사) 직원 한차연(작가의 이름 가운데 한 글자만 다른 사실상 작가의 분신)은 장례식장에서 영화배우 손예진을 닮은 여자 원형과 마주친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 차연은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면서 서로 대화를 하게 된다.

“위로라는 게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과정이라면, 위로의 과정?” “자신의 슬픔이 다만 자신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 슬픔 자체보다는 그 속에 매몰된 자기 자신에게 더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때로는 그런 자각만으로도 비로소 위로의 긴 치유과정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죠.”(103쪽)

원형과 하룻밤을 지새우게 된 차연은 그러나 원형과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다. 원형은 십 년은 더 된 은색 폴더 핸드폰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보석함을 집 안에 보관하고 있다. 차연은 보석함에 적힌 이름에서 기시감을 느끼며 기억을 헤집은 끝에 깨닫는다. 그 이름이 장례식장의 고인 중 하나였음을. 어느 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차연에게 그를 안다는 성이연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는데 혹시 기억하느냐, 고 원형이 묻는다. 그러나 차연은 이연을 기억하지 못한다. 차연은 어디서 어떤 사연으로 이연과 마주쳤던가. 그러다 차연은 불현듯 떠올린다. 애위사의 187번째 위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4년 전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이연을 네 번이나 만났다는 사실을.

그때 이연은 위로 프로그램의 의뢰인이었다. 이연은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동반자살시도 끝에 두 사람은 숨지고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숨진 사람의 가족을 위로하는 프로그램을 차연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반복되는 우울증 치료, 가출과 입원, 네 차례의 자살 시도. 지쳤어요. 그만 끝내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진정으로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의뢰인이었으며 정작 그녀 자신은 이를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175쪽)

소설은 차연이 이연을 자살동반클럽 사람들로부터 구출해 상경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정작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죽음의 슬픔에 직면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느냐에 맞춰져 있다.

“절박한 그 순간에 거짓말처럼 느닷없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슬픔에 빠진 얼굴들, 우울에 지친 얼굴들, 친구를, 아내를, 연인을, 어머니를, 생후 삼 개월 된 아이를, 군대 간 아들을, 그 밖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느 갈 갑자기 떠나보낸 뒤 그 빈자리로 인해 고통 받는 얼굴들. 애위사에서 그간 만나왔던 의뢰인들이었다.”(259쪽)

한차현은 ‘작가의 말’에 “이 글을 쓰는 삼 년 내내 슬픔장애재활 도우미가 되어 생각하고 살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 글을 생각하고 고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만큼은 그 비슷한 운명을 살아가야 했다”고 썼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