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재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입력 2014-05-09 02:25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문득 떠오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다.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44년 이 시를 지었을 때는 나치즘의 광풍이 불어 닥친 어두운 시대였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부조리한 상황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각인되던 때였다.
2014년 대한민국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지 못한 슬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 언제 어디서 또다시 안전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더 이상 재난 사고로 아까운 생명을 잃지 않도록 일관된 재난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비롯해 비용보다 안전을 우선시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고, 안전 교육과 사고 대응 훈련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국가가 재난 사고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을 적극 치유하고 지원하는 제도를 갖추도록 촉구하는 일도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진짜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피해자들끼리 서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면서 상처를 덧내는 일이 재난 현장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을 치료하고 있는 고대안산병원 고영훈 교수의 말이다. 차라리 암 투병 끝에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면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갑작스러운 재난 사고는 황망해서 남은 가족들을 더욱 피폐하게 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가정이 파탄나기도 한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하지만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을 보듬고 위로하며 치유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생존자 및 희생자 가족에 대한 배려와 치유는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다.
요즘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한 번 더 보고, 더 안아주게 된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돌아보았다. 저개발 국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초고속 성장을 이룩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우리가 너무 물질적인 성공에 집착하고 경쟁에 몰두하는 사이에 정작 ‘안전’과 ‘생명’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역시 선박회사가 승객 안전보다는 수익 창출에 집착한 과욕의 결과가 아닌가. 특히 이번 사고로 낱낱이 드러난 정부의 무능력에는 분노를 넘어 자괴감을 느꼈다. 형식적인 안전검사, 초기 구조활동 실패, 어설픈 사고 수습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나 또한 언론인으로서 정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바로잡지 못한 데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원칙을 지키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중 정치부 차장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