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名文으로 피어난 고려 인문학과 문화의 힘

입력 2014-05-09 02:19


고려를 읽다/이혜순/섬섬

우리에게 고려 시대는 조선에 비해 덜 친숙하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사인간의 편지 등 무수한 소품 자료가 남아있는 것과 달리 고려시대의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자료가 있더라도 당시 글의 형식을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고 일반인이 가까이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한문학을 개척한 1세대 연구자로 손꼽히는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쓴 이 책은 의미가 크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믿을만한 번역자의 안내로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치적인 글, 외교문서, 논설문, 편지, 비문 등 공문서와 사적인 영역의 글을 통틀어 72편의 글을 소개한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매여 있던 조선 시대와 달리 왕은 왕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할 말은 건네는 직설적인 화법과 소통 방식이 눈에 띈다.

태조 왕건은 932년 서경으로 백성을 이주시킨 뒤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도는 등 민심이 흉흉한 것을 우려하며 신하들에게 교서를 내린다. 고려사 ‘태조 15년(932) 5월 갑신 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금 사방에 고된 노동이 계속 되고 백성의 부담이 많은데다가 공납이 덜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는 이 때문에 하늘의 꾸짖음을 초래할까 자나 깨나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염려되는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무를 공정하게 실행하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혹 분에 넘치는 딴 마음을 먹기 때문에 이러한 재변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모든 신하들은 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라!”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얘기다.

송나라 출신으로 귀화한 임완이 올린 상서도 인상적이다. 고려사절요 ‘인종 7년(1129) 8월 조’에 수록된 글은 천재지변이 일자 왕에게 정치 폐단을 바로잡으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임완은 당시 인종의 비호 아래 위세를 떨치던 묘청에 대해 “간악한 일만을 일삼아 임금을 속이는 인물”이라며 “군주의 권위를 떨쳐 묘청의 머리를 베어 하늘의 경계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위로해달라”고 말한다. 저자는 귀화인으로서 그가 보인 충정과 직언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을 설득하기 위해 신하들이 썼던 외교 문서에선 설득력 있는 문장과 마음을 울리는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박인량은 당시 뛰어난 문장으로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했는데 요나라가 고려 땅에 설치한 시장을 폐쇄해달라고 청하는 외교문서 ‘입료걸파각장장’이 대표적이다. 박인량과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이 쓴 편지, 표문, 장계, 시문은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해 이를 엮어 ‘소화집’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외교문서는 단순 공문서가 아니라 문학작품이라 불러도 좋을 만하다고 평가한다.

우리가 충정과 절개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던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가이기도 했다. 정몽주가 당시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기념해 많은 문인들이 노래와 시를 지었는데, 그 중 이숭인이 쓴 시가 수록됐다. 이 시에서 그는 “훗날 사가가 책에 특서하기를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정몽주라’ 할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라고 칭송한다.

당시 글을 통해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인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가 고려의 처녀들을 데려가는 데 항의하며 즉각 중단할 것을 건의하는 ‘대언관청파취동녀서’를 썼다. 이 글에서 그는 특히 처녀들의 공출을 반대하는 이유를 고려의 풍속을 들어 조목조목 적고 있다.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고 부지런히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주기를 밤낮으로 바랍니다.” 이는 흔히 ‘출가외인’으로 치던 조선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고려시대 여성들의 삶과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글을 통해 문장의 힘으로부터 고려가 500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고려는 끊임없이 외국의 침략을 받으며 자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마다 이를 바로잡는 데 일조한 것이 바로 문장보국의 글들이었다.”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고려인들의 치열한 고민과 지적인 사유는 하나의 사회를 지탱하는데 인문학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