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4) 알렌, 한국 외교관으로
입력 2014-05-09 02:55
한국공사관 서기 발탁… 선교부와 이별
선교부를 떠난 알렌
알렌은 1887년 7월 주미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발탁되면서 선교부를 떠난다. 참찬관은 당시 ‘외국인 서기관’이란 관직이었다. 알렌은 선교사 일을 그만두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1889년 6월 잠시 한국에 귀국해 제중원에서 일했으나 결국 다음 해 초여름에 선교사직을 아예 그만두고 미국주재 한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직함은 끝난 것이다. 3년간의 치열했던 한국선교 초기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선교사들이 그를 떠나게 했는가
알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선교부의 창피한 싸움’에 개탄하고 있다. 장차 한국교회의 주춧돌을 놓게 되는 마펫은 알렌을 정면 공격한다. 선교하러 와서 충분한 전도의 시간을 거치지도 않고 먼저 ‘병원 같은 것이나’ 세웠다고 맹비난한다. 마펫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알렌이 선교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와 종교가 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기독교가 타협하고 양보해야할 것이 생긴다는 입장이었다. 마펫은 알렌을 선교부에서 깨끗하게 축출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시 선교사들 대부분이 신학적으로 인간적으로 알렌을 고립시켰다. 알렌이 선교사들과 사이가 멀어진 까닭은 알렌의 철저한 준법정신 때문이었다. 한미조약문은 개항한 곳 말고는 국내 여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출내기 선교사들은 마구잡이로 지방전도여행에 나섰고, 때문에 지방 관리에 의한 박해를 당하거나 감금당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때문에 일명 ‘어린이 소동’이라 해서 서양 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구워 먹고 눈알은 빼서 카메라의 렌즈로 쓴다는 음흉한 소문이 나기도 했다. 빈톤이란 선교사는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한국 사람을 통해 저질 언어로 고종에게 회개하라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미국 공사관에서 젊고 기고만장한 선교사들이 위험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공문을 보내 서울로 즉시 돌아오라고 해서 화를 면한 일은 비일비재다. 선교사들은 이런 선교 제한의 배후에 알렌이 있다며 공격했던 것이다.
분열과 갈등은 초대교회에도 있었다. 제자들도 서로 치고 박고 다퉜다. 예수님까지 판다. 바울과 베드로도 싸우고, 사랑의 사도 요한도 화를 냈다. 세상을 완전한 천사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 전체주의다. 때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준에 안 맞는 자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한다.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상이나 신앙은 무서운 것이다.
알렌이 선교부를 떠날 때
고종이 미국에 새로 세워지는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했을 때, 알렌은 ‘선교사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거둔, 그런 공덕으로 조정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영향으로 선교사들의 입국을 가능케 하지 않았던가. 그가 한국선교의 닫힌 문을 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듯 물러나게 됐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알렌은 선교부에 몸담고 있든, 국가기관에 몸담고 일하든, 선교사로서의 정신과 사명감을 그대로 계속 가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동료선교사들에게 아름다웠던 옛날처럼 변함없이 함께 잘 지내자고 말하며 발길을 돌린다. 떠날 때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 외로이 떠났다.
하나님은 한 시기에 한 가지 사명을 위해 사람을 보내신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다른 사명을 맡기신다. 그 전환기는 이렇듯 통절할 수도 있다. 가늠하지 못할 격변으로 임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 전형적인 변화를 알렌에게서 본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영광을 받으실지어다.
알렌, 그 뒤를 돌아보니
선교부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뒤돌아보니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에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이 배어 있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초기의 식구들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떠나는 이 길이 한국교회를 떠나는 길이 아니고, 그렇게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한국교회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할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렌은 결심했다. ‘앞을 바라보자!’
세계와 한국의 교량역할을 한 알렌
알렌 그는 20세기 초 기울어지는 한국의 국운을 떠받쳐 자주 독립의 길을 가게 하려 했던 푸트나 포크 공사가 가고 나서 그 사명을 기도와 땀으로 이루기 위해 노력한 한말 최후의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위해 더 큰 사명을 받은 것이다. 미국은 수호조약문에서 타국이 한국을 간섭하고자 하면 거기 반드시 개입하여 한국이 독립된 왕국임을 천명하고 그렇게 대우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생전 처음 진출하는 그 시기에 알렌에게는 그 가교 노릇을 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가 처음 한국에 기독교의 입국을 가능하게 했던 그 교량역할처럼 말이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