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3) 대전고 1년때 교회 첫 출석… 주일 기다림에 설레
입력 2014-05-09 02:42
6·25 당시 나는 을지로에 살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는 탱크를 타고 서울 거리로 밀려들어오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인민군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우익정치단체에 이름이 올라 있던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몸을 피하신 뒤였다. 화가 난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어머니와 나는 집안의 물건들을 남몰래 내다 팔아 간신이 끼니를 이어갔다. 인민군은 밤마다 어머니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완장을 차고 한강변으로 나가 내 키의 두 배나 되는 삽으로 매일같이 땅을 팠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국군에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토치카(참호)를 파는 일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폭격을 맞아 기둥이 무너지고 기와지붕도 내려앉았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넘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우리도 봇짐을 꾸려 리어카에 싣고 피란길에 올랐다. 3대 독자인 아버지에게는 변변한 친척이 없었지만 아주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연극반에 들어갔다.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내 성격으로 어떻게 연극반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대전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권투 선수였던 집주인 아들에게서 권투도 배웠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나를 옭아매었던 4대 독자, 부잣집 도련님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버리기 시작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연극반에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이순재씨가 있었다. 지금도 종종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다.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것도 대전고 1학년 때였다.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두 명의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모두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의 권유로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가대 활동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 가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성가대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여학생과 눈맞춤을 하려니 일요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면서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한 친구는 당시 우리 교회 목사님 딸과 결혼했고 또 한 친구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미국유학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활발했던 나의 대전 생활과 달리 현지에서 마땅한 사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대전고 2학년 때 다시 상경했다. 대전과 달리 서울은 활기찼다. 당시 연극무대에서 박수를 받으며 생긴 우쭐함을 어쩌지 못하던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침 허파에 바람이 가득 든 친구들 몇몇이 흔들리고 있던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패거리에 끼워줬다. 우리는 교복바지 주름을 칼날같이 세워 입고 명동이며 종로 거리를 활보했다. 고등학교 3학년을 그렇게 보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됐다.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서 7명에게 서울대 법대 원서를 써 주셨다. 합격을 장담했던 7명 중에 나만 떨어졌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후기대학에 시험을 치고 붙었지만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용돈을 얻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고 머릿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명동의 댄스클럽을 찾아갔다. 클럽을 가득 메운 남녀가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 신기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저게 무슨 춤이야?” “지루박이란 거야. 요즘 최고 인기라던데.”
다음 날 나는 대학 입학금을 들고서 댄스 클럽을 다시 찾아갔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