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지붕 한가족’ 고포마을 아시나요?

입력 2014-05-08 02:08


강원도와 경상도가 공존하는 마을이 있다. 바다 쪽으로 뻗은 폭 3∼10m의 마을 안길을 경계로 북쪽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2리, 남쪽은 경북 울진면 북면 나곡6리인 고포마을이 그 주인공이다. 고포마을은 어선 한 척 없는 어촌이다. 40가구 남짓한 주민들이 마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미역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고포마을은 찾아가는 길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울진읍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덕구교차로에서 내려 삼척으로 가는 지방도를 타면 삼척 경계에 들어서기 직전 바다를 향해 내리꽂히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한 차례 S자 곡선을 그리며 급경사의 길을 800m쯤 내려가면 미역냄새와 함께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두 줄로 집들이 늘어선 고포마을이 짙은 산그림자 속에 숨어있다.

고포마을 안길은 본래 개울이었다. 조선 태조 때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개천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다. 하지만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했던 1962년 이전까지는 경계선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울진군이 경상북도에 편입되면서 개천을 경계로 마을은 두 동강이 났다. 주민들도 행정상 양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그 후 개천을 복개해 500m 도로로 포장했는데 울진군은 이 길을 ‘고포길’이라 부르고 삼척시는 ‘고포 월천길’이라 명명했다.

미역 말리는 작업이 한창인 마을 안길 한가운데 서면 한 발은 울진 땅을 밟고, 한 발은 삼척 땅을 밟는 셈이 된다. 행정구역의 구분은 엄격해서 주민들이 감내하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로 앞집에 전화를 걸 때도 033, 054 등 지역번호를 먼저 눌러야 한다. 군청에 볼 일이 있거나 선거를 할 때도 이 집은 삼척, 저 집은 울진으로 나가야 한다.

마을은 하나인데 이장도 두 사람이다. 아침이 되면 남쪽 아이들은 울진으로 학교를 가고, 북쪽 아이들은 삼척으로 학교를 간다. 우편물도 울진과 삼척에서 각각 배달되고 ‘범죄 없는 마을’ 표지판도 대구지검과 춘천지검에서 각각 따로 세웠다. 북한의 무장공비조차 행정구역이 나눠진 이 마을의 해변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1968년 사건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부른다.

외지인들에게는 두 지붕 한 가족이라 재미있는 마을로 비춰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포마을에 사는 주민들로서는 행정구역이 달라 불편한 점이 많다. 한때는 내무부의 주도로 ‘남북통합’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행정 경계 조정은 도(道)끼리의 어업권 갈등으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울진과 삼척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어업권, 그것은 바로 고포미역 채취권이다.

고포마을 주민들은 행정구역 갈등과 상관없이 미역 채취 작업을 공동으로 한다. 말씨나 풍속도 같을 뿐 아니라 마을 잔치를 열거나 미역 채취 작업도 도(道)의 구분 없이 전체 주민들이 함께 참여한다. 행정구역이 마을 사람들의 정(情)까지 가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포마을 앞바다는 동해안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인데, 수심이 얕고 물이 맑아 햇빛이 물속까지 깊이 들어가 양질의 돌미역이 자라는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고포의 미역은 고려시대부터 중국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조선시대에는 기장미역과 함께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궁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산품이었다.

부드럽고 깔끔하고 정갈한 맛을 자랑하는 고포미역은 지금도 타 지역의 미역보다 3배 이상 비싼 고포마을의 특산품이자 주 소득원이다. 고포미역은 국을 끓이면 푸른빛이 되살아난다. 부드러운데다 향기롭다. 다른 미역은 줄기나 미역 꾸디기(미역의 머리 부분)를 잘라내기도 하지만 고포 미역은 잘라내지 않아도 될 만큼 부드럽다.

고포마을은 미역을 말리기에도 좋은 땅이다. 늦가을에 ‘짬’으로 불리는 미역바위를 닦고, 겨울에 씨를 뿌린 고포미역이 출하되는 시기는 5월부터. 이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로 불어오는 하늬바람은 산을 넘어오는 동안 건조하고 따뜻해져 미역을 때깔 좋게 말리는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하늬바람이 불 무렵이 되면 보름 동안이 농번기다. 고포마을 사람들은 타 지역의 해녀들을 동원해 돌미역을 채취한다. 채취한 미역량을 기준으로 해녀가 3할, 어촌계가 7할을 갖는다. 해녀들이 자맥질을 해 뭍으로 올린 미역은 주민들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으로 옮겨 말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연이 만들어 낸 것으로 사람은 조금씩 도울 뿐이다.

고포마을 주민들은 파도가 센 날에 더 바쁘다. 햇미역 채취 철을 앞두고 남풍인 마파람이 바다 속을 뒤집으면 바다 속 짬에 붙어있던 미역이 파도에 뜯겨 밀려 올라온다. 그러면 주민들은 익숙한 솜씨로 ‘풍락초(風落草)’로 불리는 뜯겨진 돌미역을 ‘조태’로 건져 올린다. 조태는 닻처럼 생긴 소나무가지를 5m 길이의 장대에 묶은 전통적인 미역채취 도구. 허리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로 무장한 마을 아낙 네댓명이 이른 아침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조태로 풍락초를 건져 올리는 모습은 해마다 이맘때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다.

옛날 바지게꾼들은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미역을 ‘십이령 바지게길’을 통해 소금과 함께 영남 내륙으로 바지런히 실어 날랐다. 봉화, 영주, 안동지역 사람들이 “십이령을 통해 넘어 온 고포미역과 소금, 문어 없이는 산모 몸조리는 엄두도 못 낸다”고 할 만큼 고포미역은 인기가 높았다.

바다 내음을 품고 있는 고포미역을 건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파도와 숨바꼭질 하는 고포마을 아낙들의 질박한 삶을 엿보려면 서둘러 고포마을로 여행을 떠날 일이다.

삼척·울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