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애플 등 특정 상표와 동일한 단어라고… 방송 부적격 판정 ‘황당’
입력 2014-05-08 02:19
최근 10대 남매 듀오 악동뮤지션(멤버 이찬혁 이수현)의 데뷔앨범 수록곡 ‘갤럭시(Galaxy)’가 KBS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제목을 포함해 아홉 번이 반복된 ‘갤럭시’라는 단어가 특정상표와 동일해 스마트폰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다. 가사 속에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반짝이는 은하 너머 함께 걸어가자는 소소한 사랑 고백만이 담겨있었을 뿐이다. 심의 기준을 묻자 KBS 심의실은 “가요심의위원회의 운영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며 “내부 규정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수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완성 이후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노래를 통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심의는 필요한 과정 중 하나다. 문제는 규정이 지나치게 특정 단어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격’과 ‘부적격’을 가르는 강력한 잣대는 브랜드 이름?=매주 방송사에 심의를 요청하는 음반들은 60∼80장 사이. 곡수로는 200여곡을 넘어선다. 규정에 따라 가수들은 완제품 CD와 함께 가사, 영어 가사의 경우 번역본을 제출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심의위원들은 ‘적격’과 ‘부적격’ 또는 ‘보류’ 판정을 한다. ‘부적격’ 판정을 받은 곡은 지적 받은 가사를 바꿔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KBS가 부적격 판정을 한 가요는 총 123곡. 심의실은 총 3041곡 중 4% 가량이 전파를 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를 분석해보면 앞서 언급된 ‘갤럭시’ 사례처럼 상식 밖의 내용이 적잖이 등장한다. 주로 특정 상품의 브랜드 언급, 저속한 표현, 정사장면 연상, 욕설, 일본식 표현 등이 이유였고 ‘심신 장애자에게 심리적 자극’ ‘가사가 퇴폐적’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 저해’ ‘염세적·허무적 느낌’ ‘특정인에 대한 인격 모독’ 등도 언급됐다.
부적격 판정을 받은 123곡 중 절반가량인 60곡은 ‘특정 상품의 브랜드’라는 이유였다. 가장 많이 언급된 가사는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브랜드(24회)였다. 브랜드 명과 다른 의도로도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거나, 홍보 이상의 의미를 지닌 보편적 단어들도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쮸쮸바’ ‘라면땅’ ‘애플’ ‘BANG BANG’ ‘팔도’ 등이다.
반면 웬만해선 알기 어려운 브랜드 이름도 이 그물망을 피해가지 못한다. 에디킴(본명 김정환)의 곡 ‘슬로우 댄스’에선 프랑스 보드카 브랜드 ‘그레이 구스’가, 힙합 뮤지션 우탄(본명 박천규)의 곡 ‘원 허닛(One hunit)’은 제목과 가사에 인터넷 공유기 전문업체 이름(hunit)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의미 전달의 목적 봐주길…상식적인 기준 필요”=경직된 심의에 따른 피해는 힙합 음악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유분방하게 라임에 따라 가사를 짓다보면 최신 단어를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 KBS 뮤직뱅크에서 3주 연속 1위 자리에 오른 정기고(본명 고정기)와 소유(본명 강지현)의 곡 ‘썸’도 랩 부분에 등장하는 ‘로또’라는 단어 때문에 애초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가 랩 없이 노래만 방송에서 불러 논란을 피했다. 걸그룹 크레용팝의 경우 지난달 발표한 신곡 ‘어이’의 가사 ‘삐까뻔쩍’이 일본어식 표현이라며 부적격 판정을 받자 ‘번쩍번쩍’으로 순화해 무대에 올랐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수정이나 재심의를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심의에 통과하기 위해 표준어만을 구사하면 곡의 맛이 떨어지고, 곡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없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전문가들은 방송사의 심의가 창작자의 의도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동윤 대중음악평론가는 “브랜드 홍보가 아닌 의미 전달의 목적으로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봐야한다”며 “곡 자체와 가사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잣대만을 들이미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현 규정은 대중을 우매하게 보면서 판단에 개입하고, 자유로운 창작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다”며 “시대적 추세에 따라 규정도 상식적으로, 변화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