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후회
입력 2014-05-08 02:22
고린도후서 7장 10절
온 나라가 비탄에 빠져 있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세월호 사건으로 채 꽃도 피워보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 너무나도 많이 희생됐다. 깊은 슬픔과 분노를 지나 자성(自省)의 시간을 갖고 있다.
정부는 이제까지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는 모양이다. 하지 않는 것보다야 백번 낫겠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있다는 아쉬움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러한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신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의 자리에 십자가는 어디에 있을까. 십자가의 삶은 우리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마 16:21 이하).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예배의 감격을 한껏 누리게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성전 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 위에 서 있지 않았던가. 주님은 지금 여기 나의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순종하며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성도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땅끝이다. 내가 선 그 자리에서 복음증거자의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대명령(마 28:16 이하)을 받드는 삶이다. 한국인 5∼6명 중 1명은 기독교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지탄받고 있는 정부나 공공기관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뉴스 속에서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모두는 이들을 향해 ‘당신이 잘못했다’고, 십자가를 거부해 버린 당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성도의 삶에 십자가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인 줄 알지만 이 시대 십자가는 너무나 진부(陳腐)한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고통과 치욕의 도구였음에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2000년 동안 너무나도 기쁘게 십자가를 짊어져 왔다. 그 십자가는 생명과 축복의 통로로 확증돼 왔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은 싫고, 십자가의 생명과 축복만 좋은 이 세대의 이중적 가치관은 주님의 십자가를 더 이상 성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져 보질 않았으니 은혜가 임할 리 없고, 은혜가 없는데 능력이 나타날 리는 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못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자책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만 치고 있어야 할까.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끝이 없어 보이는 죄악상을 보면서도 인내하며 기다리신다. 그 결과로 불평과 원망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스라엘이 말씀의 율례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백성으로 변화되었다. 그 백성들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세우셨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선(guide line)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 안에서 결단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십자가를 결단하라.’ 이 명령이 만만한 것이었다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으면 생명도 축복도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에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하셨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후회가 남지 않았다. 도리어 가고 오는 모든 세대의 생명선이 되어 주셨다.
최문린 목사 (강릉양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