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창준 (2) 청운초등 시절 광복…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
입력 2014-05-08 02:21 수정 2014-05-08 11:13
1998년. 네 번째 하원의원 선거에서 실패한 뒤 나는 완전히 절망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아,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구나.’ 너무 허무했다. 그토록 애태우며 가꿔온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억울했다. 정치판이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이용당한 것 같았다. 백인 정당인 공화당에서 유일한 동양인 의원이었던 나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민주당의 타깃이었다. 나는 당한 것이다.
빈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내가 거뒀던 열매는 결코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던 일들을, 나 자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목숨 걸고 달려들어 쟁취하지 않았던가.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남들 자는 시간에 일하고 밤낮없이 영어를 배워서 이뤄낸 꿈이었다. 미국 역사 교과서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실렸던 성공적인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무언가.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버렸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이아몬드바 시의 시장이 되던 날의 기쁨과 미 연방하원의원이 되던 날의 환호와 박수갈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나를 향해 몰려들던 수많은 기자들,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만세를 외치던 나의 가족과 지지자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숨어버렸다. 요한은 골고다까지 따라 나섰지만 그 이후로는 숨어버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들키지 않고 갈릴리로 돌아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지내는 것뿐이었다.
그때 내 심정이 꼭 그랬다. 문득 내 조국 한국에 가고 싶었다. 어린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그 길을 천천히 걷고 싶었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리라 다짐했다. 마음속으로 주님을 불렀다. ‘주님 아직도 제 곁에 계십니까?’
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창일 때 태어났다. 4대 독자인 내게 쏟아진 부모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기와집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나는 그다지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수재도 아니었고, 머리를 싸매고 노력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 아이였다. 종로구 통인동 청운초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이면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처음 배운 일본말이 서툴러 한국말이 튀어나오면 즉시 일본인 선생한테 불려가 따귀를 맞았다.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인가, 갑자기 ‘쐐액’하고 날아가는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말고 책상 밑으로 숨을 때가 많았다. “깨졌다 싱가포르, 물러섰다 영∼국.” 학교에서 돌아오면 ‘천황 폐하의 선물’이라며 나눠준 고무공을 튕기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어느 날 내 뺨을 때리던 일본인 선생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으스대던 일본인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학교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 너희는 한국 사람이다.”
그제야 학교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공부를 곧잘 하던 나는 아버지 권유로 보성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며칠도 안 돼 한강 다리가 끊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탓이었다. 서둘렀다면 우리도 건널 수 있었건만….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